월터 윙크(Walter Wink)의 <참사람> 3부(“참사람: 부활절 이전의 말씀들”)를 읽으며,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갖는 신비를 생각하고는 한다. 이 칭호는 기독교 내에서 예수님의 독점적이고 배제적인 호칭으로 사용되고는 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온전히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유기적 존재)으로 고백되었다. 지금에야 정통교회 내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란이 없다고 하지만, 교리가 체계화되지 않았을 때의 초기 교회가 겪은 혼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적 목적으로) 소모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기에, 교회가 쉬이 간과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책도 기독론에 대한 문제 제기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접근하는 경로는 이전의 방법론과 다르다. 서방과 동방의 교회가 각각 하나님의 화육(化肉)과 인간의 신화(神化)에 초점을 맞춘 반면, 저자는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기독론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의 기독론은 기독론 범주를 너머 인간론으로 확장된다. 아니, 어쩌면 기독론과 인간론이 융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의 깊은 곳에 있는 인간한적 계시는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 fully human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절대적 참인간 the Absolutely human으로서의 계시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속량자 그리스도 Christ the Redeemer의 나타남 안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계시되지는 않았다고 베르자예프는 지적한다. 인간의 창조적 계시는 계속되면서 완전해져 가는, 진실로 참사람인 그리스도 Christ the Truly Human Being의 계시다. 오늘날 우리들이 깨닫기 시작한 인간학적 계시는 완전히 참 인간이요 동시에 참 신이다. 즉 그 안에서 인간성은 신성의 경지로 깊어지고, 신성은 눈에 보일 수 있는 인간성의 경지로 만들어진다. - 월터 윙크, <참인간>, 113-4.
그의 주장은 다소 논쟁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통찰을 제공한다. 유일무이한 “사람의 아들”이자 “참사람”인 예수님께 전적으로 속량(贖良)의 책임을 전가한다면, 자칫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극단적 이신칭의의 위험성이 정의(justification)에 대한 무관심을 야기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어디로to 해방시켜줌 없이 어디로부터 from 해방만 하는 실패”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데에서 저자의 주장은 유의미하다(Ibid., 202).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헬라어 아르케고스(archegos)를 차용해 말하자면, 1) 예수님께서는 창시자(archegos)로서 하나님을 성육신 시킨 첫번째 참사람이 되신다. 자기 자신(self)의 온전한 인간성(인간됨) 안에서 하나님을 구현한 첫 번째 인간이시다. 2) 또한 영도자(archegos)로서 예수님께서는,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른 형제들의 모범이 된다. 진정한 사람의 아들(참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있기 때문에 맏형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형제들을 지도하신다.
하나님을 성육신 시킨 참사람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일전에 읽은 헨리 나우웬의 책 중에 상상할 만한 대목이 생각나서 해당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세 수도사가 생각났어요." 루이가 말했다. 이야기를 되살려보자면 이렇다. 머나먼 섬에 러시아 수도사 셋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교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그 섬으로 심방을 가기로 작정했다. 도착해서 살펴보니, 셋 다 주기도문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주교는 거기에 머무는 내내 열심히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는 심방결과에 만족하며 돌아섰다. 그런데 배가 섬을 떠나 너른 바다로 나서는 순간, 문득 세 수도사가 물 위를 걷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실은, 줄달음쳐 배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꽁무니를 따라잡은 이들이 소리쳤다. "사랑하는 신부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장면과 들리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진 주교가 물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럼,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 거요?" 수도사들이 대답했다. "그냥 '여기에 저희 셋이 있고, 거기 세 분 하나님이 계시는 걸 아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한없이 거룩하고 소박한 모습에 눌린 주교는 간신히 말했다. "섬으로 돌아가서 다들 평안히 지내시구려." - 헨리 나우웬,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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