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

habiru 2022. 7. 9. 12:20

 

본문: 다니엘 1:6-8(새번역)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사람인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다.
7. 환관장이 그들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는데,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고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고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고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하였다.
8.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배경 소개)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 당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물이 노략당했을 뿐 아니라, 남유다의 왕족과 귀족 들도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갔던 무리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정복국의 입장에서는 피정복국 사람들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지도자로 성장할 만한 왕족과 귀족, 인재를 데려가 교육시키는 것이 그들을 억제하는 정책보다 효과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그들을 데려다가 자신들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게 해서 친-바빌로니아파로 만드는 것이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피정복지의 문화를 억제하고 억누르는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가장 먼저 창씨 개명을 당했습니다. 일제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 개명당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들도 바빌로니아식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각각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매일 불리는 이름, 호칭은 그 사람의 본성 전체를 명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히브리 사람의 정체성을 뒤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 하필 음식인가?)
또한 바빌로니아 왕은 그들이 3년 간의 교육을 통해 친-바빌로니아 히브리인으로 거듭나길 바랐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궁중요리와 술을 주면서 향후 그들이 왕의 시중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왕이 내린 음식을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게 됩니다. 어릴 적, 저는 이 본문을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지 않겠다는 것으로 듣고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우상숭배 및 제사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음식과 포도주가 바빌로니아의 신에게 드려진 제물이었고, 그들이 요구했던 채소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채소를 달라고 했을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다소 아리송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왜 음식이 자신을 더럽힌다고 했을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되었건 먹는 것과 유대인으로서의 신앙, 정체성이 연결된다는 생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먹는 일”과 “신앙하는 일”이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하는 일”이 그의 생사를 걸 만큼 “사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생소할 수 있지만, 이슬람교에서 “할랄”이라는 음식법이 있고, 유대교에도 “코셔(코쉐르)”라는 음식법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활동했을 당시 유대교의 특징적인 표지(sign)를 들자면, 개중 하나가 음식 규정이었습니다. 얼마나 음식 규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냐면,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열매를 먹으라, 먹지 말라”로 시작합니다. 레위기 11장은 음식 얘기이며, 이 같은 전통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유가 음식법 위반이었고, 사도행전의 주요 본문인 9-11장의 베드로의 환상도 음식법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의 제물 문제도 음식법과 연관된 얘기였습니다.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예수님께서 빵(레헴;lehem)집(베트;beth)에서 태어나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식사하시고, 부활하셔도 엠마오 제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셨을까요?

(“먹고 사는 일”과 신앙의 상관성)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먹는 일”이 우리가 신앙하고 “사는 일”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사는 일”에 진심인 이유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음식과 신앙이 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신앙은 “먹는 일”을 포함하여 “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만, 대개 이신칭의를 말하면서도 그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듯합니다. 신앙은 좋다는데, 먹고 사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먹고 사는 일과 신앙을 이상한 방식으로 혼합합니다. “먹고 사는 일”과 신앙이 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앙은 “먹고 사는 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이 “먹고 사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값없이 여기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먹고 사는 일”은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라틴어 신앙(credo)이라는 말의 뜻은, 지적 동의(assensus;assent)가 아닌 “심장을 바치는 헌신”의 의미, 충실함으로서의 신앙(fidelitas;faith)이라고 합니다. 그 라틴어는 자신의 심장을 바치는 것으로서 ‘크레도’는 “나는 충성하겠습니다,” “나는 헌신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믿는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영어에서 “믿는다”(believe)와 “사랑한다’(belove)는 서로 연관된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믿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초기 교회,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신자들이 치른 값어치를 아십니까? 가족과 친인척으로 구성된 마을, 고을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그곳에서 저주를 받고 추방됩니다. 심지어 유대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저주하는 기도를 올리고는 했습니다. 쫓겨난 이들은 오늘날처럼 연고지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저주를 받아 마을에서 쫓겨난 그리스도인은 들짐승과 산적, 도적의 위협을 받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유대교, 유대인으로 뭉쳐 있는 사회에서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그리스도인 사회가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새로운 가족, 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라는 말,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옵니다.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믿음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주님(caesar)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로마 황제(caesar)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창과 검이 아닌, 평화를 의미하므로 창과 검을 들 수 없었습니다. 직업 군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직업을 전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신앙과 복음이 변질되면서 침례를 받으면서도 오른손에 칼을 들고 침례를 받는 기이한 일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권력을 위한 투쟁과 수단으로써의 폭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사는 일”과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먹고 사는 일은 단순히 직업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직장 외에서도 하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의 신앙과 무관하다면, 자칫 우리는 신앙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삶과 신앙을 연결하진 마십시오. 그런 강박과 강요, 집착이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할지 모릅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상상해 봅시다. 저는 여전히 고민 중입니다. 무엇이 좋은 삶이고,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좋을지 말입니다.

그럼에도 먹고 사는 일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중심이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은혜를 입었던 증거를 고위 공직자, 총리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하진 맙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들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화덕과 사자 무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뼈와 살이 녹는 풀무불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맹수의 공격 중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도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를 위해)
특별히 다니엘에게 주셨던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의 내용에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꿈과 소망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가질 꿈과 소망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10에 나오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에는 대가가 따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한 사랑과 충성, 헌신을 지킵시다. 고달픈 밥벌이, “먹고 사는 일”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놓지 맙시다.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나는 “먹고 사는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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