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금요일, 느긋하게 잠에서 깨어나 몸단장을 했다. 10시 10분, 세종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집을 나섰다.
2. 그날따라 버스에서 읽으려던 책이 유난히도 읽히지 않았다. (나는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를 읽고 있었다) 데리다가 문제인지, 테드 제닝스가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꾸역꾸역 문장문단을 읽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독서란 고루한 과정을 견디어 내는 것이고, 인생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3. 서울에 도착하자 나는 재빠르게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2주 전에 했던 검사의 결과를 들으러 누나와 함께 병원에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신촌역 근처에서 즉석 떡볶이를 먹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병원으로 향했다. 혀끝에서 전해지던 뜨거움과 차가움의 온도차는 무얼 의미하던가!
4. 언덕배기 너머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두어 시간이 따분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기엔 애매하고 그냥 흘려 보내기엔 아쉬운 시간, 무료하진 않으나 의미있게 시간을 보내기란 늘 어렵다. 화타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달려 왔다.
5. 마침내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나지막하게 내게 암이라는 단어를 중얼대듯 말했다. 흐린 말끝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되물었다. 그렇다. 갑상선암이 맞단다. 내 몸에 대한 진단이 내려졌다. 이제껏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몸을 관리하지 못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현실주의자다. 빠른 수긍과 함께, 이제 나는 무얼 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다.
6. 첫째, 리듬에 맞춰 몸의 준비를 하면 된다.
병원에서 창조해 낸 리듬에 따라 나는 몸을 긴장시키면 된다. 수술이라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내 삶을 조정하면 된다. 많은 변화가 있을 테지만 리듬이야 타면 그만이다.
7. 둘째,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된다. 예전 티브이에서 어떤 고려인을 본 적이 있다. 비록 되돌아갈 수 없지만, 그가 자랐던 고향을 곱씹던 그의 표정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나는 교훈을 얻었다. 과거를 곱씹을 때만이 의미 있는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였는지 곱씹고, 누구여야 하는지 생각해 내면 된다.
8. 유쾌하지 않는 소식이지만 생각 외로 잡생각이 없다. 감사할 따름이다. 질병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한층 이해하는 커다란 마음을 품고 싶다.

'갑상선암 치료 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상선암 수술 6일차 (0) | 2020.12.07 |
---|---|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0) | 2020.12.04 |
갑상선암 수술 하루를 앞두고.. (0) | 2020.12.01 |
종말(終末)의 일상성 (0) | 2020.06.22 |
병고의 은총 (0) | 2019.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