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구현된 은유인 교회

habiru 2017. 8. 12. 14:54

  결국 신약 성경과 현재 시간 사이의 은유적 관계를 분별하는 과제는, 은연중에 신약 본문의 의미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과제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바울은 제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성숙하지 못한 고린도의 작은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인상적인 은유를 만든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그들의 말다툼과 과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대신 은유적인 과감함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복수에 주목-역주) 모든 사람이 알고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갈등하는 이 공동체의 존재는,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이 놀라운 주장은 본문과 공동체 사이, 즉 신약 성경과 교회 사이의 해석학적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창을 열어 준다.만일 도덕적 판단을 하기 위해-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신약 성경이 공동체적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형성하는 데 사용하는 은유-만들기가 필요하다면,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변화된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밝혀 준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떠난 상태에서는 성경이 읽혀질 때 듣는 자들의 마음에 수건이 드리워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6, 18).


따라서,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면서, 본문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살아 있는 은유가 된다. 은유의 능력은 변증법적이다. 본문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는 본문의 의미를 구현한다(embody). 이처럼, 공동체가 성숙해 감에 따라 그리고 변화하는 상황을 대면함에 따라, 신약 성경에 대한 신선한 독해를 생성시키는 해석학적 피드백의 고리가 생겨난다. 

  확실히 공동체의 변화는 단순하게 인간의 해석학적 재간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이 주장하듯이,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오직 교회가 공동체 내의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성경을 신선하고 담대하게 풀이한다. 바로, 성경의 본문에 그렇게 약속되어 있다(참고. 고전 2:6-16; 요 16:12-15).  성령은 공동체로 하여금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성찰하도록 재형성하고, 그로 말미암아 본문에 새로운 빛을 다시 던진다. 그러한 조명적인(illuminative) 결합은 예측 불가능하며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부인하거나 배제하는 교회는 자신이 "의문(gramma, 고후 3:6)의 숨 조이는 통제에 갇혀 있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유를 기록하신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해석 과제의 최종적 차원에 대한 설명에 이르게 된다. 오직 '말씀'이 구현되는 곳에서 올바른 성경 읽기가 발생한다. 오직 우리가 본문에 의해 변화되기 위해 우리를 그 능력에 맡길 때, 본문이 의미하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가 그의 중요한 책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s)에서 해석학을 '책임질 수 있는 이해, 즉 적극적인 이해의 실연(enactment)'으로 정의하려 했던 이유이다. 해석학적 과업은 분석과 주석 작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 즉 우리의 해석이 '위험을 감수하는 헌신'의 행위가 되도록 자신을 개입시키는 방식으로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다. 니콜라스 래쉬(Nicholas Lash)가 그의 논문 "성경 공연하기"(Performing the Scripture)에서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성경 해석의 근본적인 형태는 신앙 공동체의 삶, 활동 그리고 조직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지침을 따른 한 가지 결과는, 신약 성경의 해석은 고립된 개인에 의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의 구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발생한다. 해석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활동이다. '성경의 공연'은, 래쉬가 주장하듯, "교회의 삶이다. 고립된 개인이 이 본문들을 실행하는 것은, 혼자서 베토벤의 4중주를 연주하거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공연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공동체에서 성경의 공연을 경험하는 해석자들은, 본문에 대한 더 깊은 통찰과 조명을 제공하는 독해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이 구현되는 것을 본 다음에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설이다. 행동이 가능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지 않은가? 이 역설을 파악하기 위한 두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 우리는 성경이 이제 막 동굴에서 봉인된 채 발견된 것처럼 아무런 바탕 없이 성경 읽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1,900년 동안 이 본문을 읽고 실행해 온 공동체의 후손들이다. 마치 "리어 왕"의 새 공연(래쉬의 예)이 배우들의 기술과 감수성의 신선한 산물인 것처럼, 우리의 해석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해석은 우리를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전에 본문의 의미를 조명했던 경우들을 가리킬 수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즐겨하는 말이 있다. "성인들의 삶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이다."

  둘째, 드라마 공연이나 집단 뮤지컬 공연 또는 스포츠 팀에 참여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제 공연에서 리허설의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막이 올라가고, 청중이 반응하며, 다른 공연자들과의 상호 작용이 예기치 못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그렇게 연극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배우게 된다. 가장 좋은 경우에-위대한 본문에 대해 진지하게 실행했을 때-우리는 본문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지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배운다. 

  신약 성경 자체도 말씀 구현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주장한다. 로마서 12:1-2에 있는 동사들의 진행 순서는 의미심장하다. "너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은유를 들으라!].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공동체가 자신을 드리고 변화받은 후에 온다. 왜인가? 본문이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과제는 말씀 아래서 살고자 애쓰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 Richard B. Hays, <신약의 윤리적 비전>, 4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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