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어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habiru 2023. 6. 23. 16:41
시편 69:16-17(새번역) 
16. 주님, 주님의 사랑은 한결같으시니, 나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께는 긍휼이 풍성하오니, 나에게로 얼굴을 돌려 주십시오.
17. 주님의 종에게, 주님의 얼굴을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에게 큰 고통이 있으니, 어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도입]

샬롬!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교우분들의 기도 덕분에 목사 시취 면접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석양이 지는 하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하늘도 맑아 구름이 많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면서 푸른색의 하늘이 점차 노란색, 붉은색,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쩜 하늘이 그렇게 다채로울 수 있는지 아름다웠습니다. 한낮의 하늘도 예쁘지만, 해질녘의 하늘은 다양한 색깔 때문인지 풍부한 감정을 선물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요즘 한낮에는 볕이 뜨거워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을 수 없지만, 저녁은 아직 선선한 듯합니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해질녘 하늘을 보시면 어떨는지요. 노을진 하늘을 보며 바쁜 일상 중에 잠깐이라도 감상에 빠져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본론]

#1. 

69편 시편 기자는 매우 위험하고,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편 69:1-3, 새번역] 
1.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목까지 물이 찼습니다.
2.발 붙일 곳이 없는 깊고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물 속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으니, 큰 물결이 나를 휩쓸어갑니다.
3. 목이 타도록 부르짖다가, 이 몸은 지쳤습니다. 눈이 빠지도록, 나는 나의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제주에는 건천이 많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바위와 바위 사이에 길이 패여 있는 건천을 쉽게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천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곳으로 맹렬할 정도로 무섭게 물이 흐릅니다. 물줄기에 휘말렸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물살이 세찹니다. 바위가 많아 물이 바닥으로 흡수되지 않고, 길을 따라 그대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발을 헛디뎌 계곡에서 미끄러진 적이 있습니다. 물줄기에 타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몇 미터를 떠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몸이 굳고 뻣뻣해졌습니다.

여러분, 사막을 걷고 있다가 억수로 비가 내리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빗줄기에 고왔던 모래가 부서지고 뭉쳐져 밀도가 낮은 곳으로 모래가 꺼지게 됩니다. 낮아진 지대 사이로 물이 흐릅니다. 여러분은 모래 골짜기에 빠졌고 순식간에 불어난 물에 목까지 물이 찼습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모래 수렁에 빠졌고, 점점 물속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거센 물결이 덮쳐와 숨을 쉴 수 없고, 허우적대지만 아무도 이곳에서 여러분를 구해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절망 속에 목이 쉬도록 도움을 구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우울증을 겪는다면 깊은 물속에 몸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시편 기자도 우울증과 같은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것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1-3절에서 그토록 절망스러운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슈투트가르트 라틴어 시편 채색 필사본> 시편 69편의 삽화에는 물속에 빠진 선지자 요나를 떠올리는 그림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가 빠진 상황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던 요나의 기도가 떠오르게 합니다(욘 2:1-5).  시편 69편이 다윗의 기도가 맞다면, 물에 빠진 요나가 시편 69편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둘의 상황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삽화가도 요나의 기도를 시편의 삽화로 그렸겠지요. 

[요나 2:1-5, 새번역]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주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2. 아뢰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
4. 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5.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2.

그런데 시편의 기도자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의 이유가 주님에게 있다고 합니다. 

[시편 69:7-9, 새번역] 
7. 주님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내 얼굴이 수치로 덮였습니다.
8.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9.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진 시편 기자에게 동정심이 일고 공감이 가기 마련입니다만, 이 부분에서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결과라고 하기엔 우리의 신앙이 쩨쩨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도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이유가 명백했던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관계 없이 겪는 고난은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잠깐 예레미야 얘기를 하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로 소명을 받고 활동했습니다만,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고 바빌로니아에 항복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도리어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했고, 심지어 그는 감옥에 갇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환난과 고난도 그의 사역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지 않겠노라 결심해도 주님에 대한 열정이 타올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렘 20:7-9).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치 시편 69편 시인의 기도를 모방하듯이, 시편의 노래를 자신의 삶 속에서 체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0:7-9, 새번역] 
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때때로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받는 고난으로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기 위해 끙끙 앓을 수 있습니다. 가끔 저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자'라고 마음 먹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 받았던 고난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별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가족과 친척에게 저주를 받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도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소와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과 돈을 환전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화내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으셨고, 그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종교심을 이용해 시장의 가판대에서 종교를 매매하고 있는 사람들의 탐욕을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예수님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 시장 매매상 등 종교를 둘러싼 카르텔 권력의 미움을 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두고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라고 합니다(요 2:17). 

 

#3. 

나중에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목이 마르다고 하셨고, 이에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예수님의 입에 대어 마시게 하였습니다(요 19:28-30). 

[요한복음 19:28-30, 새번역] 
28.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슈투트가르트 라틴어 시편 채색 필사본>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장면이 시편 69편의 삽화로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길,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식초를 내주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69:29, 새번역] 
29.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

 

[결론]

요나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시편 삽화가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편이라는 기도문이 있었고, 그에 따라 기도하기도 하고, 기도문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시편 69편에 따라 신 포도주를 받으시기까지 했습니다. 

누구나 어려움을 겪고는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들, 고통스러운 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헤쳐나가기란 어렵습니다. 신앙을 통해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고난이 신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되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문제들이 밤마다 찾아와 우리 자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처해 있는 상황이 하나하나 가볍지 않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꼬여 있는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가 매우 힘들고, 그것을 찾았다 한들, 해결해 가는 과정 자체도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의 무게에 매몰되어 질식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성경 이야기 안에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비단, 이것은 고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등 우리를 격정에 싸이게 하는 경험 속에서도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경험과 감정, 상황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느끼고 있는 감정, 생각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간 선배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욱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구현할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시편의 삽화가들을 기억해 봅시다. 고난을 승화시키는 과정들을 기억해 봅시다. 그들은 시편의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했고, 시편의 기도문 속에 그들이 느끼는 경험들과 감정들을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경험들과 감정들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기도문 속에서 삶이 정초한 자리가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시편 안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제비뽑기 하듯 성경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 안으로 그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렇게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경험이 쌓이길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에 관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마릴린은 20대 중반의 결혼한 여성이었는데, 우리 지역에서 역사가 오랜 회사에 변호사로 새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도 나왔다. 나는 아직 그녀를 알아 가는 중이었다. 마릴린은 자신이 검사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은데 아무런 진단이 나오지 않아서 의사들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녀를 찾아온 의사는 신체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감정이나 정신상의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병문안을 갔다. 이번에는 마릴린이 자신의 문제가 감정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동의했다며,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로 예약을 했다고 했다. 안도하며 그러나 아직은 신중하게 내가 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마릴린은 망설였다. 그러다가 수줍게 말했다. “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제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새롭게 형성되는 회중의 목사로 있은 지 3년이 되는 때였다. 그때까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사람은 마릴린이 처음이었다. 마릴린의 수줍은 요청은 내 일과 일터의 핵심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 소명에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기도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중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섬기기를 원했던 나는 기도는 혼자서만 하고 사람들이 부탁하는 일만 해주었다. 그런 내게 마릴린의 부탁은 돌파구가 되었다. 나는 그 말의 역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 내가 목사라는 소명에 진실하다면, (...)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방법을 찾을 것이고,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것이다. 보통은 조용히 그리고 종종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복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 Eugene H. Peterson,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 양혜원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2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