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9-20, 새번역]
19.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월 마지막 주일, 많은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고는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이자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성 베드로 성당을 보수, 건축할 자금을 벌기 위해 큰돈이 필요했고, 이에 교회에서 돈을 받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면벌부(면죄부)였습니다. 이는 일종의 사면권을 보증하는 증서로 볼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광복절 특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뉴스에 광복절을 맞아 수감 중인 유명 정치인 X가 특별 사면권을 받느냐, 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특별 사면을 받으면 수감 중이었던 X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기간 동안 범죄자를 구금하는 징역형이 더 이상 집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 사면은 감옥 생활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면벌부도 그러한 기능을 합니다. 죄지은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사해 주는 교회의 공인된 증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손들이 낸 동전이 헌금함에 쨍그랑 하는 순간, 연옥에서 고통받던 조상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직행한다”라며 판매를 했는데, 저라도 빚을 내서 면벌부를 샀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 타락한 교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촉발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루터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도전적이고 저항적인 행동으로 개신교(Protestant; 저항자)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 이전과 이후, 수많은 신앙 선배들이 타락한 교회를 갱신하고, 개혁하기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열정을 촉발시킨 사건과 배경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만, 오늘 저는 00침례교회가 소속된 “침례교회”에 대해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부분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종교개혁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개중 하나가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입니다. 이는 종교개혁(Reformation)에 대한 쇄신, 응수(Counter)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반종교개혁의 주체는 로마 카톨릭교회입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라는 회의를 통해 교회의 교리를 체계화하게 되었고,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만들어 교회에 대한 엄격한 충성 서약을 하는 수도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엄격한 규율과 자기 훈련으로 기동성이 높았던 예수회는 결과적으로 서방 교회의 아시아 선교와 아메리카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서강대학교가 예수회 소속의 대학입니다.
그리고 제3의 종교개혁, 다른 말로 급진적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의 주체로 불리는 이들이 있는데, 그 부류를 재침례파(재세례파)라고 합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을 허물고, 성경의 토대 위에 교회를 재건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서방 교회의 전통은 다양한 전통 중, 그들이 문제로 제기했던 것 중 하나가 유아세례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유아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을 택하느냐, 택하지 않느냐는 문제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기독교인이 되거나, 기독교인이 아닐 자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구 하나, 자신이 출생할 국가를 고른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 될 것을 고른 적도 없고, 태어나니 부모님을 따라 국적이 주어졌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주민센터에 출생신고를 함으로써 호적에 등록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교구에 등록된 신자가 됩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출생신고와 유아세례는 유사한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누구나 기독교인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런 사회는 너무나도 공포스럽습니다. 어디에도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딜 돌아봐도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신념으로 점철된 전체주의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어느 날, 종교 경찰이 지난주 예배에서 사도신경(신조)을 제대로 읊조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옆집 순이를 체포했습니다. 평소 순이네 아버지와 자주 다퉜던 철이네 아버지가 순이를 종교 경찰에 신고한 겁니다. 그렇게 보름 가까이 조사를 받은 후, 순이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된 순이의 모습에 모두 놀랐습니다. 순이의 팔, 다리 곳곳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밝은 갈색이었던 긴 머리는 검정 색 짧은 머리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순이는 이명 증세로 병원을 오가는 듯했습니다. 그 이후, 순이는 교회당 제일 앞에 앉아 큰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읊조립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입니다. 중세 시대, 교회에 의해 “마녀” 혹은 “이단”으로 불린 사람들이 종교 재판을 받고, 헛된 교리로 사람을 미혹했다는 선고로 고문과 죽임 당한 것은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날 샤리아라는 국법을 시행하는 이슬람 국가를 대입해 보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던 재침례파들이 기독교 국가가 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것보다 그들은 유아세례의 유효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들은 자기 결단에 따른 신앙 고백과 회심에 따라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기를 다짐한 이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후, 다시 침례를 받게 됩니다.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던 이들이기 때문에 재세례파, 재침례파로 불리게 됩니다. 유아세례를 부정하게 된 꼴입니다.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것은 신학적 논쟁을 차치하고, 중세 유럽, 국가론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세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터나 칼뱅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유아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지만, 그것보다 저는 재침례파가 기독교 국가로서의 상식을 파괴한 것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아세례는 기독교 국가의 기초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루터와 칼뱅은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재침례파를 교화가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이교도는 개종의 대상이 되며,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는 축출의 대상이 됩니다. 기독교인 아닌, 이교도는 불순물로써 정화의 대상입니다.
일례로 칼뱅이 목회하던 제네바 시에서 많은 사람이 추방되고 목숨을 잃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루터와 칼뱅이 훌륭한 신학자이자 개혁자였지만 그들 또한 한계와 부족한 점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업적과 과오를 균형 있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에 비해 재침례파는 자발적 신앙 고백과 회심을 중요시했던 무리로 세속 권력과 기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재침례파 입장에서는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보다 근원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근원적이라 함은, 성경이라는 유일한 토대 위에서 교회를 개혁하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이 아닌, 오직 성서 위에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원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사람들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은 서로 닮아 있다고 합니다. 재침례파는 신학적인 면에서 보수주의자면서 사회 개혁을 외치는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진보적인 개혁주의자, 개혁적인 보수주의자, 그런 정체성을 유지했던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문법 안에서 쉽게 규정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개혁은 제3의 종교개혁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사실 루터와 칼뱅에게는 지방 영주나 제네바 시의회 같은 세속 권력에 기대어 교회를 개혁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방 교회가 위세를 떨치던 도시나 성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이단 사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세속 권력의 후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후원하는 세속 권력자의 이익과 상충하는 목회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때, 늘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시던 A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부서 청소년의 학부형이셨는데, 새벽마다 반갑게 인사하시고는 했습니다. 자취하던 저를 가엽게 여기면서 예배 전에 종종 텃밭에서 따온 것들을 종종 나눠 주시고, 반찬거리도 주시던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A자매님이 예배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는 했습니다. 당시 A자매님은 기획부동산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A자매님이 걸려서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기억이 납니다. A자매님이 기분 상할 한 얘기가 나올 것 같으면, 돌려 말하느라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루터와 칼뱅도 지방 영주, 시의회의 눈치를 보느라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재침례파는 신앙의 자유, 정교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보다 신앙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산상수훈을 중요하게 여기며 예수 따름의 제자도를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침례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저는 가끔 재침례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합니다. 자유로운 예배 방식과 평화를 지향하는 신앙이 인상 깊습니다. 재침례파는 침례교회가 태동하는 데에 자양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심에 대한 강조는 침례교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재침례파의 유산을 물려받은 침례교회는, 무엇보다 기독교 국가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면서 세속 권력과 야합하고 있는 종교 장사꾼이 많습니다. 정치권력과 자본주의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정치적이고 부의 권력을 가까이하는 종교인이 많습니다. 이 시대, 00침례교회의 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 타의가 아닌 자발적 신앙 고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의에 의한 신앙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시스템과 사람, 프로그램에 의해 나의 신앙이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돌아보는 기술에는 말씀 읽기와 묵상, 기도, 영성 일기 등이 있습니다. 군중 속의 하나가 아닌,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신앙입니다. 자연스럽고도 자유롭게 영혼이 반응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율법주의는 다른 말로 문자, 조문에 의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문자와 조문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를 자유롭게 인도합니다. 반복되는 하루, 일상 속에서 내 영혼을 돌아보는 일에 힘쓰시고, 영혼의 고백에 귀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길 빕니다.
둘째, (정. 1)세속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돈이 우상이 된 문화, 권력과 서열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문화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탐욕스러운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개인의 원칙으로 체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 2)또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메시아적 정체성은 사람을 망가지게 하는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많은 부분은 메시아적 정체성에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제자로 성실히 살아가면 됩니다. 제자로서 증언하는 영광을 구하면 됩니다. 제자 된 공동체로서 증언하는 일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세웁시다.
잠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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