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더가 바르트에게 배운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기초는 고등 기독론(High Christology)의 강조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바르트는 자연법으로부터 기독교 도덕을 추론하려는 신학적 시도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요더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고 19세기 유럽 신학의 철학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러한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 신학의 강조는 요더 자신의 기독론중심의 신학과 윤리의 건설을 위한 신학적 지지로 공헌하였다.
"기독교인에게 평화는 가능할까?", <기독교사회윤리> 14집, 박도현, 77.
애시당초, 요더와 레비나스를 비교하는 것이란 불가능했던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요더는 지극히 고등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윤리를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며, 레비나스는 자연법으로부터 윤리를 체계화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학자의 위대한 윤리는, "비폭력저항"과 "타자"로 점철된다고 할 수 있겠다. 뭐 다르다면야 다르지만, 같은 거라도 박박 우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잼잼.ㅋㅋㅋ
드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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