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너희는…

habiru 2023. 9. 23. 16:46
[마 5:13-16, 새번역]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했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소금 결정체에 반사된 빛이 떠오르기도 하고, 햇살이 비추이는 바다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대개 소금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방부제로서의 소금입니다. 오래전부터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으로 사용되었고, 예수님이 사셨던 지역에서도 그렇게 소금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자반고등어로 안동이 유명한 이유는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내륙인 안동으로 운반하면서 소금으로 중간중간 계속 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닷가보다 내륙 지방에서 고등어가 유명한 까닭이 방부제로서 소금 때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짠맛을 내는 조미료로서의 소금도 떠오릅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고등어에 소금을 친 것이 짭조름해지니 고등어의 맛이 좋아졌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데에도 좋습니다. 오늘날에야 각종 조미료가 소금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소금은 맛을 내기 위한 필수 조미료입니다. 옛날에 로마가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이 소금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소금이 화폐로 사용되어 군인에게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다는데, 라틴어로 소금(salarium)에 쓰인 접두사(sal)가 급여(salary), 군인(soldier)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재밌습니다.

마찬가지로 빛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스포트라이트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는 기사는 하나님의 피조물 1호가 빛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는 것은 진리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보이는 건 어둠뿐인 시각장애인이 앞을 보게 되는 기사는 빛을 분간하여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사건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빛과 소금의 본문은 부패한 세상의 방부제이자 세상에 맛을 내는 조미료, 타락하여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가자는 주제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을 또 다른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본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소금은 부패 방지와 맛을 내는 조미료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쓸데없이 짓밟힐 뿐이라는 경고로 사용됩니다. 소금의 본질은 짠맛일 텐데, 맛을 잃은 소금이 가차 없이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곧 본질의 맛을 잃은 소금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건, 제자로서의 정체성과 본질을 잃는다면 밖에 버리워져 밟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경고를 하셨을까요?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앞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마 5:11).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마 10:38-39).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와 환난을 겪어야 했고, 또 이 복음서를 듣고 읽는 초기 교회의 그룹도 그러했습니다. 특히나 동료 유대인들은 그들을 고소해 법정에 세우기도 했고, 그들은 법정에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까닭으로 가족과 친족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닌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법정에서 ‘덜덜덜’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마 10:31).”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언제나 담대하게 제자로서의 정체성, 본질을 붙잡으며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속되는 유혹과 회유가 있었고, 타협하여 되돌아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기도 했고, 옛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히 6:4-6a). 제자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에도 그런 갈등이 나옵니다. 17세기, 일본 기리시단이 겪는 박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에서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동료들까지 죽임 당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쓰였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느냐, 신정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겪는 고뇌와 처절한 절규 속에서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하고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어쩔 때는 제자로, 또 어쩔 때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제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제자직이 갖는 빛의 이미지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그것은 세상에 드러나는 도시입니다. 제주는 한라산을 기준으로 완만한 능선이 이어진 섬입니다. 그래서 한라산이 어디에서 보이는지 살펴보면 대략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한라산 정상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위치를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산 위에 도시가 있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띌 것입니다. 어둑해질 무렵, 산 위에 있는 도시 사람들이 불을 켜고 생활한다면 누구든 그곳에 도시가 있다는 걸 알 것입니다. 도시는 숨길 수 없는, 노출되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등불은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등불은 감추는 게 아니고, 등경 위에 두고 밝히기 위해 사용합니다. 등불은 숨길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레 방 안의 빛을 비춥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는 것이고, 등불은 말 아래에 두고 숨겨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감추는 것이 아닌, 등경 위에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제자는 세상 속에서 숨을 수 없고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 앞에서 제자의 빛이 비추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맛을 잃어버리면 끝장난다, 이로써 제자들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 빛을 비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노력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능력으로 소금이 되기 위해, 빛이 되기 위해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짠맛을 내라고, 빛을 비추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마 5:1). 예수님께서는 나아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무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12명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그 “무리” 중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진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거룩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간 이스라엘 민족이 떠오릅니다.

제자들은 단지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전환됩니다. 복 있는 사람, 팔복에 관한 말씀은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 그런 사람들은 박복한 사람이지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dikaiosyne)”로 번역된 말은 “정의”이기도 한데, 대개 그런 사람은 도리어 화를 입습니다. 정의를 부르짖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 다수가 옥살이하는 걸 많이들 봤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깨끗하고 자비한 사람은 개인적인 칭찬은 받을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은 순진해서 호구 잡히기 좋다고 말합니다. 나쁜 사람들을 만나 사기를 당하거나 화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 관한 진실은,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가 아닙니다. 이제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처럼, 예수님께 나아간 제자들은 언약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바꿉니다. 이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에게도 통용될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을 맺은 제자들에 한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 이 세상과 다른 존재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행동 방식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걸 말씀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음으로 역전된 세상이 실현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이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신명기에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언약 백성 앞에 복과 저주가 있으니 선택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복음을 듣는 제자들도 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단,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언약을 맺은 제자들을 “너희”로 부르셨습니다. 언약을 맺은 그들은 2인칭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언약을 맺은 부부처럼, 상호관계 안에서 잊히지 않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 -


주님과 언약을 맺은 제자가 된다는 건 복 받은 일이지만, 때때로 제자직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않겠다, 제자임을 숨기며 살겠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갈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우리 내면에 있는 욕망을 죽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고통스럽습니다. 내면의 탐심과 야욕을 못 박으라는 말씀은 괴롭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 슬퍼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도 부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 선배들처럼 소수자가 아닌, 주류가 되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이라는 경고를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결혼식에서 성혼 선포를 하기 전, 주례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평생 서로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어떠한 경우는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서로의 신실한 배우자가 되기로 약속할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신실하고 좋은 친구이자 제자로 남읍시다. 이야기침례교회가 주님의 교회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신실한 공동체로 남아 있다면, 세상 속에 노출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