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24-29, 새번역]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건축가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가 이야기입니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에 앉아 튼튼하게 모래성을 쌓아도 기초 토대가 되는 바닥과 기둥이 무르기 때문에 파도가 쳐서 금방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두꺼비 집을 만들 때도 비슷합니다. 튼튼한 두꺼비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받아와서 그 위에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모래와 흙, 물이 섞인 걸쭉한 진흙으로 두꺼비 집의 형태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 진흙이 굳으면 손을 조심히 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폭삭 무너집니다.
요즘엔 건축물을 만들 때에 철근을 엮어 만든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주초공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둑판처럼 엮인 철근 위에 콘크리트를 쏟아 냅니다. 콘크리트는 시멘트와 물, 모래, 자갈을 섞은 혼합재입니다. 정확한 비율에 따라 반죽되어야 하고, 건물의 바닥이 되는 콘크리트가 잘 굳어야 건물이 튼튼합니다.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주초 공사를 할 수 없습니다. 단단한 콘크리트 위에 건물을 올려야 하는데, 비가 오면 기반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콘크리트,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어느 정도 맞는 얘기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이 시대와 장소가 고려된 복합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용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지시하는 문자를 보고, 문자 그 자체를 우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666표’를 ‘베리칩’으로, ‘적그리스도’를 ‘유럽통합’(EC)이나 ‘유럽연합’(EU)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받아들인다면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시대에 적실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외 시대에는 적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주의해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어리석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본의를 찾아야 합니다.
이 비유가 시작될 때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어 앞 단락의 이야기가 연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 단락은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입니다. 비유를 통해 산상수훈의 종지부가 찍힙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가르침은 거대한 한 편의 설교와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비유는 5장에서부터 시작된 설교의 결론이자 마지막 권면입니다.
설교의 마지막 권면은 매우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이라는 구절에서 나오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24). 슬기로운 사람은 듣고 행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명약관화합니다. 이 비유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라, 행동하라, 실천하라, 힘주어 경고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곧장 어려움에 처합니다. 산상수훈 말씀이 실천 가능한지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산상수훈 초반부에 등장하는 ’형제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아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마 5:21-26)이라는 말씀은 엄중한 경고입니다. 아예 성내는 감정을 부정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지옥 불 속에 던져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어려서는 피붙이끼리 싸우는 것이 일반입니다. 다행히 외동이라 하더라도 부모님께 성낼 것이고, 친구들에게 화를 낸 까닭으로 지옥에 가고야 말 것입니다. 자연인으로 유아독존의 세상에 살지 않고서야 지옥행을 피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피하거나 타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 형제와 자매 관계, 부부 관계에서 분노와 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이는 원천적으로 분노의 감정이 없을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엡 4:26).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이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일 텐데, 마음 수련을 통해 평정심을 찾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더라도, 수련 중에 생긴 분노로 전부 지옥행이 확실합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선한 것입니다. 살인한 사람이 재판을 받지 않는다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권력자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않고 무죄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세상은 불의한 세상입니다. 반대로 살인한 사람이 살인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보다 큰 형벌을 받는 것도 부정의합니다.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의 고통을 받는 건 부정의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발적 사고로 인한 살인에 대해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본질상 재판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범법자를 응징하고 보복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보복과 응징에 있어서 완벽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에서는 형이 집행되었거나, 집행 중인 사람들 중에 많은 수가 억울하게 형을 받은 일이 밝혀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사형제를 연구한 자료에는 사형제에서 인종차별적인 요소와 경제적 계층 차별의 요소가 나타난다는 결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1990년대 미국 상원의 사법위원회에서 사형의 오류 빈도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번복 가능한 판결의 수치가 68%에 달한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료들은 (율)법이 선하지만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산상수훈 중,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통한 사법적 정의보다 도리어 분노의 매커니즘을 문제로 짚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살인은 미움과 분노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고 원한을 가진 적이 있다면 잘 아실 겁니다. 무엇보다 분노는 제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은 불처럼 뜨겁게 타올라 화를 내는 제 자신을 살라버립니다. 마치 독을 입 안에 머금은 것과 같습니다. 서서히 독이 퍼져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얼마 전, <마스크 걸>이라는 드라마가 유행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 ‘김경자’는 아들을 죽게 만든 ‘김모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나오는 그녀의 신앙은 복수에 대한 욕망을 강화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녀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들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아들에 대한 엄마의 잘못된 사랑과 집착은 분노로 표출되고, 결국 그녀는 타락하게 됩니다. 그녀는 분노에 매여 살아있는 채로 지옥 불 속에 던져진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원한과 분노에 차서 “니 년도… 똑같이 느껴야것어… 내 고통을…”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쌍한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분노가 제 자신에게 화가 되는 일은 일상적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다툰 이후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아침에 가족과 다투고 집에 나설 때, 여간 불편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불편해 견디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빨리 화해하고 푸는 것이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분노의 악순환을 끓기 위해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원수,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제 자신을 지옥 불의 불쏘시개로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2006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학교에 침입했던 범인은 10명의 여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해 5명이 죽고, 5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끓었습니다. 로버츠라는 이름의 남자는 자신의 딸이 태어난 지 20분 만에 죽자, 이 모든 상황이 ‘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해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소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습니다. 그렇게 신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딸과 손녀를 잃은 기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희생자 부모들은 그날 밤에 로버츠의 가족 또한 피해자라고 생각해 로버츠를 조건 없이 용서한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몇몇 소녀의 부모들은 장례식 때 로버츠의 가족들을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장례 후에도 피해자 가족은 로버츠의 가족과 수시로 만나 서로 위로를 하고, 수백만 달러의 성금을 로버츠의 가족에게 전달하기까지 했습니다. 로버츠의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해 함께 위로하는 모습은 적잖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라 불리는 재침례파 아미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이 사건이 분노의 악순환을 용서와 화해의 선순환으로 바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원인이 되는 분노와 미움의 악순환을 끊어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옛 율법보다 더욱 좋은 가르침입니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더 좋은 삶의 교본이 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외세의 압제를 당했던 유대인들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분노에 기인한 정당한 투쟁이 지지받았고, 무력을 통한 게릴라식 봉기가 일어나 성공한 경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중동 어느 지역에서 끝없이 서로를 향해 테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민족과 부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무자비한 응징과 보복, 피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당사자에게는 정당한 보복과 응징이라고 하지만, 제삼자에게는 분노의 악순환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의 투쟁, 원수를 향한 분노의 앙갚음이 갖는 순환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들과 화해하라, 친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신앙과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모세는 율법을 전달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앞서 마태는 모세를 떠오르게 하는 권력자의 영아 살해, 이집트 나사렛 지역에서의 유년 시절, 광야에서의 40일 시험을 썼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긴 설교가 몇 편 있습니다. 그 설교 뒤에는 이러한 말씀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마 7:28a). (2)”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기를 마치고“(마 11:1a). (3)“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뒤에“(마 13:53a). (4)“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마 19:1a). (5)“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마 26:1a).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다섯 편의 설교 뒤에는 유사한 말씀들이 반복됩니다. 모세의 오경을 떠오르게 하는 다섯 설교문이 다섯 개의 기둥으로 마태복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으며 예수님은 적어도 모세와 비견되는, 모세보다 위대한 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옛 율법이 아닌, 새로운 교범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회피하거나, 마음 내면 어딘가에서 선택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회퍼는 제자도 없는 은혜가 ‘값싼 은혜’라고도 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더라도 그 집의 기초는 튼튼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마 16:18).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실천이 반석과 같은 ‘집’의 토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끔 합니다.
학자들은 반석 위에 세운 집이 헤롯의 성전과 비교되는 이야기라고 추측하고는 합니다. 유대인 출신이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불안한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했습니다. 성전 보수는 정치적 안정을 위한 방법에 불과했고, 성전 수리를 통해 자신의 치적을 쌓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드웨어 사업은 눈에 띄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자주 쓰이는 방식입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어디에 고속도로를 유치했다거나, 댐을 만든다거나, 특구를 만드는 것 모두 비슷한 방식입니다. 정치적인 술수가 뛰어났던 헤롯은 자신이 증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며, 튼튼한 반석 위에 성전을 지어서 어떤 비바람에도 튼튼하다고 선전했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46년간 증축되고 보수된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성전이 폭삭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 24:1-2).

우린 묻습니다. 진정 ‘집’을 슬기롭게 지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헤롯입니까. 제자들입니까.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집’입니까. 진정 하나님의 ‘집’의 토대가 되는 반석이 무엇입니까. 진정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 위에 우리의 생활양식을 조정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반석,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 진정한 성전, 교회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과 실천은 단단한 반석이 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집’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으로서 주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 따라 용서와 화해, 평화를 보여준 아미쉬 마을 주민들처럼 우리도 그러한 사람, 그러한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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