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habiru 2023. 12. 29. 17:36
[누가복음 2:25-32, 새번역]

25.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26.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27.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29.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30.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31.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32.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얼마 전, 한 잡지에서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에 관한 꼭지글을 읽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 <침묵>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의 기독교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적은 기독교인 숫자 때문에 일본을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 곳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틀린 얘기만은 아닐 겁니다만, 도리어 일본의 기독교 사상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한국 기독교 신앙에 미친 영향은 간과될 수 없습니다. 또한 우치무라 간조와 같은 기독교 사상가는 아니더라도 기독교 신자로서 엔도 슈사쿠가 기독교 신앙을 소재로 쓴 작품들이 한국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남긴 감동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의 에도 시대에 있었던 기리시단 박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기독교인 신자들을 극악한 방법으로 박해했고, 그들은 일본 정부의 탄압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잔혹한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를 숨기게 된 기리시단들의 이야기가 소설 <침묵>의 내용입니다. 여전히 일본에는 박해받는 상황 중에 기독교 신앙을 숨겼던 기리시단의 후예들이 제도권 교회의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은 채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침묵>에서는 일본인 신자들을 위해 파견된 외국인 사제들과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일본의 순교자들, 그리고 신앙에 대한 내적 갈등과 인간의 번민으로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의 모습을 골고루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실존적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박해의 상황에 부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나는 신앙인일 수 있을 것인가, 무고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절규 속에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얼 하고 계시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침묵>은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 막부의 박해에 굴복해 배교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시작됩니다. 이에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이자, 스승 페라이라 신부를 존경하던 로드리고 신부와 카르베 신부가 일본인 신자 기치지로의 안내를 받아 일본에 잠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으로 자신을 안내했던 기치지로의 밀고로 체포되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인 신자들이 막부에 체포당해 몸이 묶인 채로 바다에 던져져 죽임 당하는 것을, 또한 함께 일본에 잠입했던 동료 카르베 신부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신앙을 위한 순교라는 데에서 숭고한 죽음이지만, 동시에 허무한 죽음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갖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 신부와 일본인 신자들의 순교를 목격하는 중에 허무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들의 순교 뒤에도 기리시단을 탄압하는 박해자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번민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비단 17세기에 생존을 위협받는 기리시단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자주 슬픔과 고통을 느낍니다. 때때로 이 세상이 너무나도 모질게 느껴져 몸서리치게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살아야 한다, 살아있다는 인생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져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이 너무나도 무거워 모두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여러 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얼마나 무심하고 냉정하기만 한지요. 위로받고 싶지만 위로받을 데조차 없어 외로워질 때도 있습니다. 기도드려도 하나님의 침묵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침묵>을 읽었을 때, 제 마음속에 가장 동정이 일었던 인물은 배신자 기치지로였습니다. 기치지로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로드리고 신부를 신고했던 게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기치지로와 같은 사람을 배신자, 밀고자, 밀정이라고 비난합니다.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마왕 루시퍼의 입에서 물어뜯기고 있는 이들을 가룟 유다와 브루투스로 그립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암살한 브루투스는 몇 천년이 지났어도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 여전히 루시퍼와 사람들에게 씹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지옥에서 배신의 죗값을 무겁게 치르고 있습니다. 여러 번도 아니고, 단 한 번의 배신 때문에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채, 죽어서도 고통받는 그들이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연민과 동정이 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연약함과 번민하는 모습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치지로는 로드리고 신부를 팔아넘긴 배교자이지만,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용서받기 어려운 상처를 준 적이 있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 기억들을 곱씹으며 살아갑니다. 어느새 세월은 흘렀지만, 아무개에게 행한 후회막중한 사건과 그때에 일었던 감정들을 곱씹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일까요. 누군가는 배신자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겠냐고 묻겠지만, 저는 그와 같은 이들에게 양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죄의식, 죄책감, 부끄러움, 어쩌면 그것은 다행히 선한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치지로는 용기가 부족해 순교하지 못했지만, 살아서 제 죄값을 치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기치지로의 밀고 때문에 투옥된 로드리고 신부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그의 동료와 일본인 신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일본인 신자들이 눈앞에서 고문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회유성 협박을 받습니다. 그는 밤새 신자들이 고문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한밤 중에 로드리고 신부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후미에'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새겨진 동판을 밟으며 신앙을 저버리게 됩니다. 그때, 그는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는 주님께서 세상의 고통을 내버려 두시는 방관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끙끙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침묵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침묵이란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연약함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을 받으셨지만, 끝끝내 십자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시는 대신에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세상의 고통을 '나 몰라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시고 함께 아파하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방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우리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압니다. 
함께 읽었던 본문인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은 암흑과 같은 세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시므온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그동안 이스라엘은 위로와 구원, 평안, 구원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빛이 아닌 흑암, 영광이 아닌 불명예와 수치심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일본의 신앙인들처럼 말입니다. 
2023년은 여러분에게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위로가 충만한 세상, 평화와 안식이 있는 세상, 구원의 은혜가 넘치는 세상, 빛나고 영광스러운 세상이었습니까? 혹은 기대고 위로받을 곳이 없는 절박한 세상, 위험하고 쉴 데 없는 세상, 각박하고 힘겨운 세상, 흑암 속의 끔찍한 세상이었습니까?
지난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 2023년을 노인 시므온처럼 힘겹게 살아가신 교우분들께는 십자가를 지시며 기꺼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지속되는 전쟁과 재해의 현장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또한 2023년에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와 구원의 복을 경험한 교우분들을 위해서는 행복과 기쁨이 내년에도 계속되기를 기도합시다.
단, 주문을 외우듯 섣불리 희망을 얘기하지는 맙시다. 차분한 마음으로 침묵하고 계시는 주님의 위로와 은혜를 기억합시다. 실체 없는 희망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주님의 희망이 우리 삶 속에 있기를 기도합시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자기 팔로 안고 찬양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연약하신 아기 예수는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기억합시다. 내년을 기약하며 생명과 희망을 잉태하는 하루,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배 자료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살아 남겠느냐  (0) 2024.12.07
슬기로운 사람  (1) 2023.10.07
너희는…  (2) 2023.09.23
지혜 여인의 초대  (1) 2023.08.19
2023년 청소년여름수련회 후기  (0)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