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지혜 여인의 초대

habiru 2023. 8. 19. 17:32
[잠언 9:1-6, 새번역]

1.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세워서 제 집을 짓고,
2.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잘 빚어서, 잔칫상을 차린 다음에,
3.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높은 곳에서 외치게 하였다.
4."어수룩한 사람은 누구나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도 초청하라고 하였다.
5."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잘 빚은 포도주를 마셔라.
6.어수룩한 길을 내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명철의 길을 따라가거라" 하였다.



(인사)
샬롬!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연일 폭염주의보, 폭염경보가 이어지는 중입니다. 에어컨과 선풍기로 더위를 버티기도 하지만, 무더위에 취약하신 분들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도심지 시멘트 바닥 위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과 식물도 걱정입니다. 올해 여름에는 더위와 비바람으로 인한 사고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교회 지체들을 포함해 모든 교우들도 건강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도입-지식 과잉)
오늘날 과학과 공학, 과학 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냉장고와 세탁기, 보일러, 이제는 에어컨까지 필수 가전제품이 되었습니다. 냉장고에 음식을 저장하게 되면서 음식 가공업과 유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신선한 음식을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린 식량을 매번 생산하거나 구매해야 하는 가사 노동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는 세탁기 덕분에 때가 빠질 때까지 방망이를 들고 옷감을 두들기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매일 따뜻한 물에서 샤워를 할 수 있는 것, 겨울철 연탄 불을 지피지 않아도 밤새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것,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것 모두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사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기본적 의식주 생활을 위해 오랜 시간 가사노동을 해야 합니다. 오히려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사 노동을 배가시킨 면도 있습니다. 매일 계란과 우유, 신선한 생선과 고기를 사 먹지 않아도 되는데, 장 보러 가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빨래해도 되는데 세탁기가 생겨 매일 빨래하고 말리고, 빨래를 개키는 노동을 합니다. 매일 샤워하고, 에어컨으로 무더위를 이길 수 있어서 좋긴 하나 집을 유지하며 드는 경제적 부담으로 다른 노동의 부담이 커진 면도 있습니다. 냉장고와 식품 산업, 세탁기와 의류 산업, 보일러/에어컨과 에너지 산업은 도리어 환경오염을 부추겼습니다. 더 많은 지식, 더 좋은 기술이 기후 위기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과학 기술과 지식이 인류를 해방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만, 과학 기술과 지식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여태 증명되었습니다.

(문제 제기-지혜의 요청)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는 우리 세대와 후세대를 위해 어떻게 지혜로움을 발휘할 수 있을지, 실천적 지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식 과잉의 시기에 지혜로울 수 있느냐, 중요한 물음입니다. 평범한 개개 일상에서도 무엇이든 검색하면 되는 지식백과가 있지만, 지혜백과는 없습니다. 막상 진로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지가 막막한 데 말입니다. 아무개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해도 좋을지, 당장 적성에 맞지 않은 직장을 계속 다녀도 좋을지, 꼬여버린 가정의 제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우리에겐 지식보다 인생의 지혜가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잠언 소개)
한자어로 '잠언'(箴言)은 “바늘로 찌르듯 경계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의 히브리어 이름인 ‘미쉴레’는 비유, 격언, 금언, 속담, 담화 등의 뜻으로 우리말이 꽤 적절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잠언은 지혜를 담고 있는 책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지식이야 학교와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어디에서,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심지어 지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지혜는 다양한 학식, 박학한 지식, 그 자체를 말하거나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기도 해서 지혜자 솔로몬은 “삼천 가지의 잠언을 말하였고, 천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고, (…) 모든 초목을 놓고 논할 수 있었고,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두고서도 가릴 것 없이 논할 수 있었”습니다(왕상 4:32-33). 말 그대로 박사(博士)였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혜는 현명과 명철, 훈계(instruction)와 통찰력(insight)에 더욱 가깝고, 넓게 보면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잠언을 수록한 모음집, 금언집 등을 편집하고 관리하기도 하고, 지혜학교도 운영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이 장로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자신과 함께 자라난 소년 신하들의 조언을 듣다가 왕국이 분열된 얘기가 나옵니다. 신학자들은 솔로몬 왕을 모셨던 노인들이 잠언, 전도서 등의 문학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혜는 철학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리스어로 철학을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근원적으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철학적 물음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법륜 스님에게 ‘사람은 왜 태어났는가’를 묻자 법륜 스님께서는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긴 것’이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종교인이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이 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걸림돌-가부장제)
잠언 곳곳에서는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아내를 얻어야 한다는 교훈이 등장합니다. 이에 비해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은 우매하고 어리석은 여인으로 표현됩니다. 현대인에게 정서적으로 불편한 표현인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유혹하고, 남성은 유혹을 당하는 스토리 자체가 남성들의 판타지일 때가 많습니다. 현실은 모솔, 연애 무경험자가 많습니다. 때문에 죽어도 정절을 지키라며 은장도를 선물하고, 죽어서 열녀문을 세우는 사회에서나 잠언의 이야기는 수긍할 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여성상, 현명한 아내상, 현숙한 어머니상은, 오늘날의 정서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잠언 9장에서도 어리석은 여자는 수다스럽다, 어리석은 여자는 집 문 앞에 앉아 상대를 유혹한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폭력적입니다. 요즘엔 그런 장소가 많이 사라졌지만, 사창가 앞을 지나가면 헐벗은 여성분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내용이 딱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갈 길 가는 사람을 희롱하고, 유혹하는 문란한 여성입니다.

(정정-지혜의 의인화)
하지만 생각을 조금 달리해 보겠습니다. 잠언, 아니 성경 곳곳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나타나기도 하며 말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도 지혜는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지혜의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다시 말해 지혜, 그 자체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우매하고 문란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매 그 자체가 사람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지혜(logos)가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되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혜(hokma)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잠 8:22, 새번역).” 히브리 명사에 성별이 있는데 지혜(hokma)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지혜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지혜가 여인의 모습으로 육화한 것도 재밌는데, 저는 지혜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르침과 교훈, 훈계는 비인격적인 성격이 아니라, 인격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그녀“입니다. 대개 지혜에는 오랜 시간 동안 숙고한 흔적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씀이 “Let’s go”였다고 합니다. 그 말마디에 담긴 유진 목사님의 세계관, 지혜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시간이라는 원재료를 넣고 착즙기로 짜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 금언은 늘 농축된 원액처럼 느껴집니다.

제 편견이지만(?) 지식은 사람을 건조하게 하고 지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 가면 신2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2병과 유사한 증세를 말하는데, 신학 2년을 공부한 신학생의 용맹한 증세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신2병에 걸리면 세상의 난해한 현상과 문제에 대해 명명백백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의 태도와 우월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종교와 윤리, 사회 전반을 종횡무진 횡단합니다. 이는 뱀이 선악과를 두고 말한 바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창 3:5-6, 새번역).”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는 지식의 열매인데, 성경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지식의 위험성, 사회 전반을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경계합니다.

(본문해석-식탁)
그러나 지식과 달리, 지혜에는 창조자의 숨결, 창조자의 인품과 인격이 있습니다. 지혜 여인은 일곱 기둥이 있을 정도의 큰 집을 짓고, 고기와 포도주가 있는 잔칫상을 차렸습니다. 일곱이 완전한 숫자인 만큼 완전한 집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지혜 여인은 자신의 집에 연회를 열고, 고관대작이 아닌 어수룩하고 지각이 모자란 사람을 식탁 앞으로 초대하는 자비와 인애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손님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귐,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다스리시는 하늘나라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 주님과의 사귐과 교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혜 여인은 자신의 종들을 보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마 22장; 눅 14장). “완전한 집으로 오십시오. 함께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십시다.” 지혜 여인이 차리고 빚은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지혜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본문해석-성전)
성읍 높은 곳에서 외치는 초청의 장소는 하나님의 성전 어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혜와 만나 교제하려거든 성전으로 나아오라는 겁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라는 가르침과 상통하는 부분입니다(잠 9:10). 즉, 지혜 없이 어수룩하고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혜 여인은 자신의 삶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 헤매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사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본문해석-길)
흔히 인생을 길에 빗대 말하고는 합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왜 그랬을까, 되돌리고, 잊고 싶은 일들도 많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길이라는 데에는 사건과 사건이 연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사건들의 집합입니다. 때론 어수룩하고 지각이 모자란 판단으로 잘못된 사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온 궤적과 흔적이 남아 있는 길과 같습니다. 따라서 실수와 실패를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사건을 풀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경험들을 통해 완숙한 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수룩한 길을 내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명철의 길을 따라가거라"라는 말씀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학습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주는 연륜이 지혜의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지혜 여인과의 일회적 만남이 아닌, 지속적인 교제와 사귐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 여인은 때론 나의 어머니가 되고, 때론 나의 여인, 나의 아내가 됩니다. 어머니의 교훈과 가르침이 자녀의 배움이 되듯, 연인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상대 연인의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됩니다. 때문에 지혜 여인이 아닌, 어리석음 여인과의 만남은 주의해야 합니다. 어리석음 여인이 나의 어머니, 나의 연인이라면, 나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해석-어리석음의 유혹)
지혜 여인과 달리, 어리석음 여인은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도 지혜 여인처럼 높은 곳에 앉아서, 혹은 제 집 앞에 앉아서 말합니다. "이 숙맥아, 이리 오렴. 또 속없는 사람에겐 이렇게 말한다.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잠 9:15-17)." 지혜와 어리석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신명기에서 복과 저주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시편에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선택하라는 것, 모두 하나의 말처럼 들립니다. 지혜 여인과 사귀거나, 어리석음 여인과 사귀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음 여인은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라며 강탈과 횡령, 사기를 권합니다. 농담처럼 들리나 어리석음 여인의 훈계를 들은 결과는, 스올의 어둠, 죽음과 파멸입니다.

학자들은 말하길 훔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는 말은 혼인 외 성관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어리석음 여인의 유혹은, 인간 본연 그대로의 탐심을 부추깁니다. 선악나무의 과실을 탐한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또한 탐심에 대한 경고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음과 탐심, 파멸의 세 단계는 잠언 지혜자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탐욕, 또한 우리 자신의 탐욕이 자칫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자명합니다. 우린 어리석음, 미련함, 우매함의 유혹을 받아 발걸음을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고, 탐욕스러움을 조장하는 유혹과 가르침을 거부해야겠습니다.

(마무리-지혜의 원천)
지혜의 원천, 유일한 샘은 하나님이십니다. 지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세상 만물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고백할 때에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힘써 알아가면서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때때로 우리는 지혜와 어리석음, 두 갈래길 앞에서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지혜 여인의 풍성한 식탁에서 교제하며,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멋모르고 어리석은 여인과 함께 도둑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으며 파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차려진 식탁 앞에서 우리의 선택이 지혜로울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 교회, 우리 이웃의 선택도 늘 지혜롭길 바라며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