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충북 옥천에서 3개 교회가 연합해 청소년연합수련회를 진행했다. 교사까지 20명 내외가 모인 청소년 수련회이니만큼 예배부터 레크레이션, 음식까지 하나하나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교회가 함께했지만, 비교적(?) 젊은 30~40대의 목회자가 있는 이야기침례교회에서 행사 전반을 기획하기로 했다. (담임목사라고 하지만 형이라는 호칭이 더 편한) 한달우 형님-목사님과 함께 3~4주 전부터 이런저런 행사를 기획했다. 예배부터 레크레이션, 토크 콘서트, 그리고 가장 우려스러웠던 매 끼니 식사준비까지 무탈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하나님 은혜" 곱하기 "참석자 모두의 배려"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번 수련회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컨텐츠보다 함께하는 공동생활이 중요하다.
수련회나 아웃리치, 단기선교여행 등, 행사를 치를 때마다 함께하는 사람들 간에 얼굴 붉힐 일이 적잖다. 계획부터 행사 진행, 갑작스런 변수에 대처하는 방법 등. 다툴 이유와 까닭은 충만하고 차고 넘친다. 그렇게 삔또가 상하게 되면 거창했던 목표의식과 비전, 영혼구령의 열정, 사랑의 섬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로의 영혼을 잡아먹을 듯한 맹렬한 비난과 저주, 갈등만이 남을 때가 허다하다. 사역의 결과물이 불만족스럽다면 누군가를 원망하든지, 피드백을 빙자해 상대의 실수와 허물을 들춰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이런저런 목표와 비전보다 함께했던 공동의 생활이 더욱 인상 깊게 남아있을 때가 있다. 집 떠나 불편하고 불쾌한 환경에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배려하고 양보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잔잔한 감동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기억 속엔 첫 단기선교 여행지였던 중국에 함께 갔던 성수 형님이 떠오른다. 춘절을 맞아 긴 시간 이동해야 하는 열차 칸에서 몇몇은 입석표를 얻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고단하고 지친 일행들이 하나둘 좌석에 앉아 졸고 있던 까닭에 성수 형님은 오래도록 좁은 통로에 서 있어야만 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볼 때마다 늠름하게 서 있던 성수 형을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닌,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빌 3:17). 그래서 나는 컨텐츠는 기름지고 번드르르하지만, 공동생활이 개차반인 수련회를 신뢰할 수 없다. 밥 먹은 후에 자신의 밥그릇은 스스로 치우는지, 자신이 식사한 식탁에 떨어진 음식물을 정리하고 의자는 제자리에 두는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신발을 정리하는지, 널브러지고 지저분해진 숙소를 정리하는지 등등. 무덥고 다습한 한여름의 짜증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고 배려하는 모습 속에 은혜와 감동이 절로 넘친다. 그런 면에서 수련회를 통해 함께 생활하는 데에서 얻는 지혜와 가르침을 얻는 편이 훨씬 낫다고 본다. 나로서는 교회 행사일수록 컨텐츠는 플러스 알파 가산점일 뿐,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둘째, 저녁집회 설교를 하며 맞이한 대혼란(?)을 잊을 수 없다.
지리적으로 옥천군 외곽에 마련된 시설은 야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본체 벌레의 습격에 취약하다. 더군다나 지속되는 장마로 집회 장소의 샷시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늦은 밤, 환한 빛을 따라 샷시 없이 pvc방풍비닐이 덧대 있던 실내로 벌레들이 날라들었다. 벌레들에겐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허술하게 군데군데 테이핑만 되어 있던 틈을 뚫고 각종 나방, 매미, 풍뎅이까지 설교 시간에 난입했다. 나는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리며 나방 자매와 풍뎅이 형제들에게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벌레라면 질색팔색하는 10대들 앞에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제스처와 멘트들은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벌레들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졌다. 설교의 맥락이 한없이 끊어져 나조차도 설교의 길을 잃기도 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이걸 끝까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요한계시록 상황처럼 진정한 벌레들의 아포칼립스, 재앙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메뚜기 무리가 덮친 재앙과 비슷하려나. 급박하고 산만한 상황에서 어찌어찌 설교를 꾸역구역 해냈다는 데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기도가 부족했나, 설교가 부족했나 끊임없이 자책했을 듯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책하지 않고서도 허허실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된 듯하여 한편으로는 대견했다. 청소년들이 요한계시록의 아포칼립스 장르를 몸소 체험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며 피식 웃음이 났다. 다만, 앞으로 우리 세대가 살아갈 기후위기, 각종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팅.

'예배 자료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2) | 2023.09.23 |
---|---|
지혜 여인의 초대 (1) | 2023.08.19 |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0) | 2023.07.22 |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1) | 2023.07.17 |
어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0) | 2023.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