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디아코니아적 교회

habiru 2022. 10. 22. 15:36
[행 6:3-7, 개역개정]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위대한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분 중 한 명입니다. 인도의 사상가인 간디는 “백 년마다 한 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라고까지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프란체스코는 많은 사람에게 교훈과 영감을 준 성자입니다. 모르는 분이 계실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12세기, 이탈리아 아시시라는 동네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10대 시절에 친구들과 흥청망청 노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성년이 되자 그는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그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 후 1년 동안 그는 감옥에 갇혀 전쟁 포로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로 큰 병을 앓게 됩니다. 아마도 전쟁으로 겪는 후유증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병환 중에 있던 그는 이전과 달리 방탕한 삶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자연스레 유흥을 즐기던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병을 앓으며 그는 종종 깊은 동굴이나 교회에서 기도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하루는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도하던 중, 그는 환상 중에 음성을 듣게 됩니다.

프란체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


그 음성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그가 알고 있던 성 다미아노교회를 수리하기 위해 벽돌을 나르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교회당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아버지의 돈까지 사용해 교회당을 수리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를 오가며 사업을 크게 하던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프란체스코는 아버지 가게의 물건을 팔아 교회당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교회당을 지을 벽돌을 구걸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프란체스코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의 정신 질환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재산마저 잃게 되자 그를 어르고 달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프란체스코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 프란체스코를 시 당국에 고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중재에 나선 재판정에서 프란체스코는 말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재판관과 가족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속옷까지도 벗어두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그는 탁발수도사로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수도자로 살게 됩니다. 옷 한 벌 외에 가진 것 없이 그는 사람들에게 빌어 먹었지만, 그는 설교와 구제 사역으로 사람들을 섬깁니다. 특별히 그는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나병 환자를 보신 분이 계신가요? 어린 시절에 애양원,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를 만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프란체스코도 두려운 마음으로 나병 환자를 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한 체험을 한 이후, 그는 나병 환자를 예수님처럼 섬기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 진행될 때, 모슬렘의 지도자 술탄 앞에서 설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교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그의 진정성을 높이 산 술탄이 무사히 그를 돌려보낸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의 빛나는 사역과 달리, 그 당시의 교회는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부패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며 가난하고 곤고한 신자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난하고 청빈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프란체스코를 따르던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형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교회의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 사역자이기도 했지만, 세상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설교하고 구제하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성직자가 아닌 평범한 신자로부터 시작된 신앙 운동을 교황을 위시한 교회에서 환영할 리 없습니다. 부유하고 호사스러운 성직자들이 가난하고 청빈한 프란체스코의 운동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율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패한 성직자들은 프란체스코와 작은 형제단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앙 운동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프란체스코와 작은 형제단은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수도회로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프란체스코의 신앙 운동은 교회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고, 나태해진 중세 교회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대개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자를 말할 때, 루터나 칼뱅,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관해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나 얀 후스, 에라스무스 같은 위대한 신앙 선배들이 없었다면 결코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셔서 무능하고 부패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적 맥락 가운데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묵상과 감사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린 프란체스코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


그에게 말씀하셨던 무너져가는 교회란, 성 다미아노교회가 아닌 바로 타락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무너져가는 교회가 성 다미아노교회라고 생각해 낡은 교회당을 수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은유적 상징이 되어 부패한 기독교회를 수리하고 고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과정을 00교회만의 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교회당을 새로운 터 위에 다시 짓는 과정이 한 단계 나아가 이 시대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건축물로서 교회당은 언젠가 낡고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수리하고 보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결사체이자 운동체로서의 교회는 낡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드웨어로서의 교회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로서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내년 초에 교회가 완공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엄청난 과업을 성취하신 것이고, 모두 축하받고 박수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가 눈앞에 있습니다. 이제는 하드웨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로서 교회를 어떻게 건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완공을 앞두고 있는 시기에, 아이러니하게 어두운 이 시대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 또 다시 과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중 하나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본문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 초반부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제주 어떤 교회에서 제주에서 나고 자란 교인과 육지에서 이사 온 교인이 서로 갈등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어느 한 편이 구제에서 제외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불만이 생긴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섬김의 직분으로 일곱 명의 집사가 세워집니다. 그들은 구제에서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섬기는 일을 합니다. 사도들도 말씀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이후로 더 이상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가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7절).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와 집사가 섬김의 사역을 한 것을 봅니다. “섬김”이라는 단어를 원어 성경에서는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이 “섬김”의 사역을 통해 말씀과 교회가 흥왕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들어온 이후, 한국 교회는 급격한 성장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에서 2천 년 동안 경험한 것을 불과 10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경험한 탓인지, 이제 한국교회는 빨랐던 성장만큼 빠르게 쇠퇴 중입니다.

쇠퇴기에 들어선 교회는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을까요? 저는 디아코니아 섬김을 통해 개혁과 갱신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프란체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섬김을 통해 무너져가는 교회를 일으킨 것처럼 우리도 섬기는 자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0교회가 할 수 있는 섬김의 실천이 무엇이 있을까요. 교회 전체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1)교회 구성원 간의 섬김을 고민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과부를 돕는다는 것, 당시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것을 고려하면 꼭 필요한 섬김이었습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과부는 능동적으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 중에 신체적 혹은 정서적인 건강 면에서, 혹은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서로 돌보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 저도 질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응원하고 기도하겠다는 말에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알음알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서적으로 무력함에 빠진 이들에게는 따뜻한 차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당장 목마른 사람에게는 중보기도보다 냉수를 내어주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로 육아가 힘든 부모를 위해 몇 시간만이라도 육아를 지원할 수 있고, 진로가 고민인 청년, 청소년들과 치킨을 뜯으며 고민을 나눌 수 있습니다. 반찬거리가 고민인 맞벌이 부부에게 밑반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환절기 이불 빨래와 청소가 고민인 어르신 댁에서 청소와 빨래 봉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일곱 집사와 같은 교우 분들을 섬김을 통해, 또한 사도들과 같은 목회자들의 말씀 섬김을 통해 교회가 흥왕하길 바랍니다.

또한 2)교회 구성원 간의 섬김과 함께 지역 사회를 섬기는 사역에 대해 고민할 수 있습니다. 제가 00동의 지리를 잘 모르지만, 동네 인구 밀집도가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 어딜 돌아봐도 주택가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역 환경은 사람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보다 차량이 우선입니다. 차량과 인도 경계가 불분명해 초등학교 앞에서도 어린이들이 차도로 통행해야 합니다. 주택가와 차량은 많은데, 사람 친화적인 공간이 부족합니다. 제주도의 도시공원 1인당 공원 면적이 전국 최하위라고 합니다. 즉, 지나가다 누구나 쉴 수 있는 공원,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00아파트 우레탄 놀이터에서 놀아야 하고, 어른들은 지나가다 쉴 곳이 없어서 편의점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행히 교회 앞에 화장실이 있어서 용변을 해결할 수 있지만, 잘못하다가 실수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초등학교 앞에 간식 하나 사 먹을 수 있는 분식점이 없어서 편의점에 가는 어린이들이 딱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 엄마들은 육아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아이를 등교시킨 후에 가볍게 점심, 차 한 잔 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카페나 빵집도 잘 안 보입니다. 집 앞에 마실 나갈 공간도 부족합니다. 교회가 지역주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섬김이 있을 것입니다. 제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하자는 얘기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만,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자는 취지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막 10:45).

잠깐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