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1-3, 새번역]
1.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인사] 오랜만입니다. 앞으로 2주 동안 한00 목사님을 대신해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어색할 수 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3주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재밌는 통계를 봤는데, 목회자를 대상으로 “온라인 교회를 공교회로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개중 3명 중 1명만이 온라인 교회를 인정할 수 있다고 응답한 것을 봤습니다. 담임목사 중에서는 28%가, 부목사 중에서는 35%가 인정할 수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미 00침례교회 내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교인이 계시기도 한데, 이번 기회에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서로의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해 성전을 향해 기도하던 다니엘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창조 기사: 대칭] 예전에 여러분께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대칭을 이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공간을 만드시고, 공간 안에 거할 것을 만드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비 부부가 신혼집을 꾸민 후에 들어가 사는 것과 같고,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방을 꾸민 후에 자녀에게 방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공간을 만드신 후, 차례대로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그 공간에 거할 동물을 만드시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돌보고 사랑하라] 즉, 목회자 모세가 계시받았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만물을 생장케 하시고 번성시키시는 하나님,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였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정원사로서 동산을 돌보시며, 목회자로서 양육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라는 명령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인간도 돌봄과 사랑에 충실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수반되는 힘겨움] 그러나 돌봄과 사랑, 양육에 헌신하는 일이란 매우 고달픈 일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란 너무나도 고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고통과 눈물이 수반됩니다. 희생과 포기 없는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의 사랑에도 아픔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슬픔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김현승 시인은 자식을 떠나보낸 아비의 눈물을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결정체가 종국에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연애 시절을 떠올려 보면, 연애에 소요되는 감정 소모량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연인의 호흡과 말투, 어조, 눈빛, 손짓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문자 메시지에 남긴 점 하나, 이모티콘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합니다. 연애 시절의 풋풋함을 회상하면 즐겁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감정이 10년이 가도 그대로라면 어떨까요. 만성 상사병 환자로 피골이 상접해져서 금방 천당에 가시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랑이라도 쉼이 있어야 합니다.
[변증법: 쉼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의미] 돌봄과 양육, 사랑에 있어서 쉼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밤낮을 기준으로 그날의 일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가꾸는 정원사이자 목회자로서 돌봄과 사랑의 일을 하실 때와 쉬실 때를 구분하셨습니다. 직장인들도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직종에 따라 그 반대가 되거나, 혹은 연속 근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순환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하고 쉬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소명과 책임도 돌봄과 사랑의 노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돌봄과 양육, 사랑하는 일에 힘쓰기도 하고, 또한 쉼이 있어야 사랑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낌없는 돌봄과 사랑을 위해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즉, 쉼을 통해 일의 값어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고향 여수에 살았습니다만, 그때까진 여수가 아름다운 도시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타지에 살다가 돌아와 보니 여수가 좋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제주도 아름답지만, 제주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선 제주가 아닌 곳에 살아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상, 제주에 이주해 온 사람이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감탄하는 건 봤어도 제주에만 살았던 본토인이 그런 건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가 아름다운 건 땅이 있기 때문이며, 산이 아름다운 건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쉼이 있어야 돌봄과 양육 노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돌봄과 양육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한다면, 오히려 그 의미는 어느새 옅어지고 퇴색될 것입니다.
[리듬을 이용한 사람다움의 영성훈련] 그런 리듬을 가져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밤과 낮이 뒤바뀌는 순환 속에서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시간을 모아 한 주라는 시간으로 리듬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더욱 사람다워지기 위해, 더욱 사람되기 위해 사랑과 돌봄의 화신(化身)으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만물을 생육시키고 충만케 하는 돌봄과 사랑의 노동을 하되, 그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정력을 회복하는 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열정을 다해 사랑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반복하는 리듬을 가져나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소명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사람의 소명이 명확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순환되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소명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그리고 안식년이 7번 돌아 50년마다 맞이하게 되는 희년을 통과해 사람은 점점 더 사람다워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은 구속, 회복의 날입니다.
[레위기 25:25, 새번역]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희년을 통해 사람을 억누르던 채무가 탕감되고, 종이 자유인으로 신분이 회복되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희년을 맞이하기 전, 낮과 밤의 하루, 안식일, 안식년을 통과해야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습니다. 밤과 안식일, 안식년을 통해 자유인, 곧 참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유인(참사람)이 마법처럼 만들어지는 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인(참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요행을 바라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회갑, 환갑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십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십이지를 조합해 60갑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는나이로 61세가 될 때, 1갑자가 돌아왔다고 해서 회갑, 환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근원적으로 시간과 리듬을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올해 기준,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 수명이 84.1세라고 합니다. 대략 여성이 남성에 비해 6세 정도 오래 사는 것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더욱 사람다워질 수 있을까요. 돌봄과 양육, 사랑에 더욱 진심일 수 있을까요. 밤과 낮,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기본 정신은 사람의 소명, 사람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을 통해 생육시키고, 번성케 하고, 충만케 하라는 인간 본연의 소명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이자 끝입니다.
[사람의 리듬으로 창조하기]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서는 종국에 우리가 누릴 영원한 안식에 대해 얘기합니다.
[히브리서 4:10-11, 새번역]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건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종국에 완성하실 창조입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는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7일째 안식일까지 다룹니다. 지금 오늘도 역사는 영원한 안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창조의 완성, 안식을 향해 우리가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돌보고 사랑하라, 그 소명에 부응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해 힘쓸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당하게 일하고 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수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과 자연을 돌보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창조의 완성, 안식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선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도 그 일을 함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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