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habiru 2023. 7. 17. 17:17
(요한계시록 3:14-22, 새번역)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 도입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에 대해 들어보거나 읽은 학생이 있습니까? (…) 제네시스라는 자동차 브랜드가 창세기라는 책 이름이듯이 요한계시록도 어렵지 않게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한계시록의 영어 명칭을 ‘Revelation’이라고 하는데, 단어에는 “폭로(하다)”, “계시(하다)”, “드러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또 다른 영어 이름인 ‘Apocalypse’는 “덮개를 걷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미래의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는 합니다.

  영화나 소설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포칼립스 장르에 대해 들어봤을 겁니다. 아포칼립스 장르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의 이미지와 맞물려 “세상의 종말”, 또는 “그에 준하는 재앙과 재난”을 일컫는 장르입니다. 좀비 출현으로 인한 재난을 다룬 “부산행”, “월드워Z” 등이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 영화에 해당하고, “매드맥스”, “터미네이터”, “혹성탈출” 등을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영화 장르로 들 수 있습니다. 친숙하게 얘기하자면, 요한계시록은 John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쓴 아포칼립스 장르 작품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요한을 아포칼립스 작품의 공동 저자로 말하는데, 여러분도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요한이 쓴 아포칼립스 장르의 편지로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아포칼립스 장르에 해당하는 성경 책은 요한계시록 외에도 다니엘서가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요한의 아포칼립스 작품을 모두 다룰 수는 없습니다. 아쉽지만, 작품이 시작되는 이야기의 일부만을 다루려고 합니다. 관심이 있는 친구가 있다면, 수련회가 마친 후에 시간을 내서 책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거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목사님께 여쭤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동진 평론가처럼 여러분에게 작품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책에서는 베르길리우스가 지옥과 천국의 안내자이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는 전도사(Evangelist)가 안내자 역할을 하는데, 오늘 밤엔 제가 여러분의 안내자가 됐으면 합니다.


2. 본론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은 요한계시록 3:14-22 본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3장은 요한의 소명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고, 4-22장은 종말과 환상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터키입니다. 이 지역을 성경에서는 소아시아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이 도시에 위치한 교회들에게 요한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계 1:4, 새번역)


  단, 편지(작품)의 저자가 갇혀 있던 지역은 ‘밧모’라는 이름의 섬이었는데, 이 섬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시계 방향으로 편지의 수신처 교회가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1:9-11). 컴퓨터가 있다면 워드로 타이핑해서 이메일로 보냈으면 좋을 텐데, 요한에게는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통의 편지를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읽은 후에 서머나 교회로 편지를 또 다시 보내는 방식입니다. 편지를 인쇄/복사해도 좋겠지만, 당시엔 복사기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 편지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공동 편지가 된 것입니다.

  눈여겨볼 점은 각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말미에 해당 교회만이 아닌, 전체 일곱 교회“들”이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읽은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메시지이지만, 다른 교회들도 이 메시지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각 교회에 대한 메시지 말미에는,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A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은 A교회에 해당하는 이야기임에도, B교회와 C교회도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들에 대한 요한의 편지를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해당하는 메시지는 경주다사랑교회, 새물결침례교회, 이야기침례교회도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도 아포칼립스 세계에 초대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그리는 세상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와 무관한 세상이 아닙니다.

(질문)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영화가 있나요? (…) (걸그룹 ‘에스파’에 세계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에스파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광야(KWANGYA)라는 세계, 마이(MY)라는 친구, 나이비스(naevis)라는 조력자를 알고 있겠죠. 에스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사 속에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마블 세계관, DC 세계관 등…)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작품 속으로 몰입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주인공이 되어 “나라면 어떡했을까”라는 공상을 하기도 합니다. <더 글로리>를 보며 학교폭력의 피해자 주인공이 되어 어떻게 연진이와 그 일당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어벤저스>,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시빌 워>의 히어로 아이언맨이 되어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도 요한계시록의 수신자가 되어 그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 그분은 누구신가: 아멘이시며,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은 “아멘이시며,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입니다. 사실 이 말은 동어반복과 같습니다. “신실하다 “, ”참되다”, “동의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함께하신 창조의 근본입니다. 다른 편지에서 요한은 그분에 대해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요 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제 나이가 30대 중반이고 제 아버지 연세가 60대 후반인데, 지금껏 저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별다른 요구를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공부하라, 운동하라,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학 진학할 때에도 어디, 어디에 지원하라, 그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아버지의 뜻대로 한 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은 것 같지만, 어느새 저도 아버지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배운 적 없지만, 아버지의 말투와 행동,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하나하나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저를 보게 됩니다. 제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 뜻대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 같지만,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제 안에 아버지의 모습이 있고, 아버지 안에 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군가가 예수님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모르느냐?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장). 앞 장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 속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13:1).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분이셨습니다(요 13:4-5). 그 모습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신실하고 일관되게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교회의 상황: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모습과 달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라오디게아 도시 근처에는 유명한 두 가지 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근처 도시 히에라볼리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있었고, 또 다른 도시 골로새에는 시원한 물이 유명했다고 합니다. 온천수는 치료 효과가 있었고, 시원한 물은 식수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라오디게아 지역의 물은 미지근하여 쓸모가 없었다고 합니다(계 3:16).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피로가 녹습니다. 따뜻한 탕 안에 들어가면 그간 긴장되었던 근육이 이완되어 급격히 졸려오는 느낌도 듭니다. 잠깐이지만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해져서 다시금 기분 좋게 몸이 긴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냉수 한 그릇을 벌컥벌컥 마시면 생수의 청량감에 활력과 생기가 돕니다. 갈증이 가시기엔 뜨거운 물보다는 냉수가 좋습니다.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나 골로새의 냉수는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물은 미지근하여 쓸 모 없다고 합니다. 미지근한 석회수에 가까워 식수로 먹기에는 역겹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여러모로 풍족했습니다만, 실상은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 도시는 은행업과 무역업이 발달해 돈이 많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환전과 저금, 대출을 위해 라오디게아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을 것입니다. 또한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안약의 재료가 나는 생산지여서 안구질환과 관련된 의료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모 산업이 발달해 의류 가공업이 발달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도시의 실상은 가난하고, 눈이 멀고,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비어 있는 수레, 실상은 비어 있는 깡통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하고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실상 영혼이 바싹 메말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사람들, 연예인들은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똑똑할 뿐 아니라, 하나같이 잘 생기고, 예쁘고, 재능과 재력이 넘칩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본 모습을 알면 공허할 때가 있습니다.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재력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건, 사고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병들어 있고 메마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 채, 자존감 낮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풍요를 위해서 은행에서 현금을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비루함을 감추기 위해서 값비싼 명품 옷을 사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위해서 안약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움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데에 경제적 풍요로움은 도리어 장애가 됩니다. 경제적 풍요로움이 결코 사람의 영혼을 윤택하게 하지 못합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는 소비를 통해 나다워질 수 있다고 부추깁니다. 지금부터 10년도 지난 시기에 탄생한 광고 문구 중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정말 소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맞습니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재화가 끊임없이 유통되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유통의 기본은 소비인데, 소비하지 않고서는 사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신념이 진리 노릇을 합니다. 매년 정부에서 경제 성장률과 경제 규모를 발표하는 것이 당연하고, 뉴스에서도 이를 시시때때로 보도합니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장마 피해가 컸습니다. 이재민, 사상자가 어떻게 되는지 뉴스가 나오는 곳에 슬그머니 재산 피해 규모가 함께 거론됩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사상자와 별개로, 각종 포탄과 무기 사용으로 군수업체들은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종전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역의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에 대한 뉴스가 도배될 겁니다. 세계 곳곳에서 공병대가 파견되고 각종 기업이 도시 건설 사업을 수주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릴 겁니다.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 없지만, 이미 각종 건설 자재와 기술을 사고파는 행위를 통해 얻는 전쟁 편익에 대해 많은 기업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경제 규모와 달리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동반성장하지 않습니다. 뉴스에서 올해 국내총생산 GDP, 지역별 GRDP 규모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말하지만, 그 수치에는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사랑과 돌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족과 애인, 친구를 사랑하는 행동, 몸이 불편한 가족과 친구를 돌보는 행동, 나의 가족과 친구를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행동,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 영혼을 돌보는 시간 어느 것 하나 수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비인격적입니까.

  주님께서는 소비사회의 타성에 젖은 채로 살아가는 당신의 교회와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시며 사람들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껍데기 아닌 알맹이를 사랑하십니다. 앞서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개중 처음으로 등장했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2:4).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3:16).

이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언어로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처음에 지녔던 그(녀)의 사랑이 식고, 지금은 미지근한 석회수의 비릿한 사랑만이 남아 있다면, 주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관계를 청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 ‘다시 마음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당신의 마음 문을 열고 그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밥을 함께 먹는 가족, 곧 식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즐겁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매일의 식사는 행복합니다. 정성스레 차린 밥을 사랑하는 사람이 먹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함께 식사하자고 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허기진 나의 영혼, 목마른 나의 영혼에게 주시는 영원한 떡과 생수를 상상해 봅시다. 분명 그 식사는 풍성한 만찬, 부족함 없는 연회일 것입니다.  

3. 결론
  여러분! 요한이 보여주는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 살게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쾅쾅쾅! 여러분의 마음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괴한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여러분에게 사랑을 구하는 분입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문 밖에서 기다리실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똑똑똑, 여러분의 마음 문에 노크하고 계시는 연인을 맞이합시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십시오. 혹은 저를 포함해 주님의 사랑을 알지만, 식은 마음으로, 공허한 말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분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 문을 엽시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사랑한다 말해도>라는 곡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사를 읽어 드리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랑한다 말해도 / 김동률 곡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 함께 있어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
난 네 앞에 서 있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채. 떠오르면 또 부서지는 수없이 많은 말.
나를 사랑한다 말해도 그 눈빛이 머무는 그곳은 난 헤아릴 수 없이 먼데.
너를 사랑한다 말해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두 눈이, 말라버린 그 입술이.

나를 사랑한다 말해도 금세 침묵으로 흩어지고 네 눈을 바라볼 수 없어.
너를 사랑한다 말하던 그 뜨거웠던 마음이 그리워져, 그 설렘이 그 떨림이.
어쩌면 이미 우린 알고 있나요. 그래야만 하는가요.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 함께 있어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


(기도 인도)
우리의 마음 문을 엽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끝나지 않을, 영원하고 신실한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분과의 사귐 안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던집시다. 이곳에는 그 영원한 사귐을 아직 모르는 분이 계실 것이고, 어떤 분은 사귐의 관계 안에 있으나 사랑이 무뎌진 분도 있을 겁니다. 영원한 사귐의 관계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시는 주님을 대신해서 말합니다. 이제 문을 여시고, 주님과 영원한 식탁, 영원한 사랑의 식사를 함께합시다. 더는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와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양식을 함께 먹고 마십시다. 그 따뜻한 밥상에서 주님과 화해합시다.

'예배 자료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청소년여름수련회 후기  (0) 2023.07.31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0) 2023.07.22
어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0) 2023.06.23
성령을 받아라  (2) 2023.05.27
그들의 눈이 열려서  (2) 2023.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