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11-17, 새번역]
11.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12.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
13.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스올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내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14. 하나님, 오만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일어나며, 난폭한 무리가 나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15. 그러나 주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16. 내게로 얼굴을 돌려 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17. 은총을 베풀어 주실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
은혜와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몇 주간 장마로 전 국민이 힘들었습니다. 충청, 경북 지방에 내린 폭우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에 내린 엄청난 양의 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사연을 들을 때마다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얼마 전, 경북 예천의 내성천에서 실종자 수색을 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해병대 장병 채수근 일병이 순직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종자를 수색하던 도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다가 14시간 만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시험관 시술로 낳은 외동아들이라는 사연이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은 더했습니다. 지난 3월에 입대해 아직 100일 휴가도 가지 못한 20세 청년의 죽음에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도 보게 됩니다. 당시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 대원들이 구명조끼도 착용하지 못한 채,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다는 뉴스에 공분이 일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빕니다.
설교를 준비하던 금요일 밤 11시경에 포털 뉴스에 뜬 실시간 기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과 관련한 기사가 있었고, 대통령의 장모가 통장 잔고증명 위조 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는 기사,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 부족 간 갈등으로 모녀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는 기사, 신림동에서 일어난 묻지마 칼부림 기사 등이 링크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뉴스도 좋은 소식, 행복을 전해 주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참담하고 끔찍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각종 선거가 있을 때마다 공정과 정의를, 신뢰와 지지를 보내 달라고 여당과 야당이 편을 갈라 말하는 것을 봅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금방이라도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막상 군중을 선동하는 정치적 수사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정치철학자들은 법과 제도, 정치를 통한 정의 만들기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개중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분배를 통한 정의(distributive justice)가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을 배분할 때, 그에 따른 결과가 각 개인들이 기대한 기준과 같은지 살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 후에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김밥 10줄을 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배고프다는 이유를 말하면서 김밥 5줄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교우들이 김밥 5줄로 점심식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 허기진 사람이 있으니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당 1줄씩 김밥을 분배할 때, 공정하다,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보응의 정의(retributive justice)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놀다 보면 티격태격 싸울 일이 많습니다. 저는 남중, 남고를 다녔는데, 남자들끼리 생활하다 보면 유치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지는 일이 생기고, 묵찌빠를 하며 꿀밤을 주고받다가 감정이 격해져 발차기를 날립니다. 왜 반칙을 했는데 페널티킥 인정을 해주지 않는지, 왜 살살 때렸는데 배 이상으로 세게 때리느냐 하는 이유입니다. 나이가 들어 군대에 가도 비슷합니다.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 폐쇄적인 공간에 모여 있다 보면 동물적 본능, 그러니까 권력을 향한 의지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우두머리 수컷의 권력 아래, 서열을 따라 줄 세우기가 만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비굴하고, 비겁한 서열이 만들어집니다. 부대에 전입 신고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기 한 명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요새 애들 개념이 없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입대 시기만 조금씩 차이가 날 뿐인데 말입니다. 동갑이거나 한두 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또래에 불과한데, 그렇게 심한 꼰대가 될 수 없습니다. 팔짱을 끼는 것마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용납되거나 용납이 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어떻게 짬도 안 되는 녀석이 공중전화기에 ‘앉아서’ 전화를 할 수 있느냐,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느냐, 선임의 허락도 없이 ‘컵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느냐, 시답잖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분을 삭이며 많은 사람들이 ‘나는 저런 선임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후임이 들어오면 내리사랑, 아니 ‘내리갈굼’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갈굴 수 있는지 기상천외한 방법이 개발됩니다. 코를 골고 자는 후임에게 방독면을 씌우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요새 애들은…”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시작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갈구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체득됩니다. 내리갈굼의 메커니즘 기저에는 “나는 이만큼 고생했는데, 나와 같은 정도로 네 놈도 고생하지 않으면 불공정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통해서 정의가 세워질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배나 응보를 통해 진정 정의가 실현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제도나 정책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데, 늘 사각지대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지자체장 군수의 모친이 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에 입주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다 보니 누가 포함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얘기가 나옵니다. 누군가가 포함되면 누군가는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약 10년 전쯤 송파구 석촌동의 반지하에 살던 세 모녀 일가족이 숨을 거둔 일이 있습니다. 당시 60세의 박 모씨는 35세였던 큰딸, 32세였던 작은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박 모씨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으나 병원비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작은딸은 만화가 지망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생활비와 병원비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실질적 가장으로 식당에서 일하던 박 모씨가 몸을 다쳐 식당 일을 그만두면서 생계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1달이라는 시간 뒤에 세 모녀는 생활고를 문제로 목숨을 스스로 끊었습니다. 집세 및 밀린 공과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그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 제도가 취약계층으로 구별된 사람들만을 돕는 선별적 복지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발생했던 일입니다.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되어도 그다지 세상은 바뀌지 않는 듯합니다. “정권 심판론 vs. 정권 안정론”의 구도는 지겹습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더 못 산다”라는 식의 정치구호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 안팎으로, 또 자기 자신이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부정의’, ‘악과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악전고투합니다. 보다 좋은 세상,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있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보다 좋은 사람, 보다 위로와 용기를 주고가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있기도 합니다. 대개 그 방법은 맞서 싸우고, 간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저지하기 위해, 기후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정치적인 방식으로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 사회 활동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이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86편 시편 기도자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입니다(시 86:1, 새번역).” 간구란 우리의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요청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사회의 만연해 있는 부정의한 악, 나 자신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을 신뢰하는 주님의 종을 구원하여 주십시오(시 86:2, 새번역).”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때로는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목사님들로부터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려면, 소나무 한두 그루는 뽑아야 한다고 합니다. 산에 가서 기도를 하며 소나무를 세차게 흔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두께의 소나무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작은 소나무를 잡고 흔들었더니 진짜로 뽑힐 것 같아서 관둔 적이 있습니다. 목이 쉬도록 부르짖어서 쇳소리가 나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실제 영성과 어느 상관관계가 있을지는 모르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시간과 영성이 반비례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뿐 아니라 저질스러운 말과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하는 기도자를 많이 보셨을 겁니다.
꼭 거창한 문제가 아닐 때도 간구할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이러저러한 기도를 요청받기도 합니다. 건강과 사업, 진로, 신앙 등등. 기도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제 주변에도 가끔씩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10년 전쯤 유아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만났던 학부모 집사님이 계신데, 지금도 가끔씩 기도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내십니다. 유아유치부 전도사는 아동들을 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모님들을 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대해드리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 사역지를 옮겼는데도 문자를 보내시는 게 이상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교회도 아니거니와, 제가 담당했던 장년 교구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상황을 여쭤보고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리다 보니, 10년이 지나도 가끔씩 기도를 요청하는 문자를 받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요청하시는 기도 내용이 매번 비슷합니다. 자녀 문제, 남편 문제, 직장 문제, 경제 문제가 대부분인데, 기도를 해도 응답이 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외 대부분 요청받는 기도가 비슷합니다. 가정 문제, 관계 문제, 경제 문제, 사업 문제, 진로 문제 등등, 매번 업데이트되는 기도를 요청받아도 다 비슷비슷합니다. 혹시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가 아닌지 의심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대개 기도 자체가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응답받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며 충족되지 않는 부분들이 대부분 인간 관계, 건강 문제, 경제 문제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기도가 꼭 그런 성격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마 6:31-32).” 경쟁적으로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요청하는 기도는 임기응변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본질적 문제이므로 장기적이고, 일관된 기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발현되고 나타나는 문제 하나하나가 구체적이라 그 문제에 붙잡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방사람들은 말하길, 개역성경에서 중언부언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린다고 합니다. 빈 말을 되풀이하면서, 그런 말을 많이 하여야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6:7-8).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무언가 입 밖으로 말하고 간구해야 하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물론 간구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도자는 간구의 기도를 올리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시편 86:6-8, 새번역]
6.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7. 주님께서 지으신 뭇 나라가 모두 와서,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8. 주님은 위대하셔서 놀라운 일을 하시니, 주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상상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를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시 131, 새번역).” 얼마 전, 읽었던 시편이었는데 그 뒤로 자주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성화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것도 이와 유사할 듯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한 이후, 기도자의 기도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서약과 함께 찬양을 돌립니다(11-12절). 여전히 환란에 빠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13-15절).
[시편 86:11-15, 새번역]
11.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12.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
13.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스올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내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14. 하나님, 오만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일어나며, 난폭한 무리가 나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15. 그러나 주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간구의 기도를 올립니다(16-17절). 시편 86편 기도자의 기도는 간구-묵상-간구의 구조입니다. 86편의 기도는 간구와 묵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기도를 보여줍니다.
[시편 86:16-17, 새번역]
16. 내게로 얼굴을 돌려 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17. 은총을 베풀어 주실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늘 간구하는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간구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한 발짝 나아가 묵상과 함께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면한 문제보다 문제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구하는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환난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긴박한 구원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건이 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묵상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 26:38-39)”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간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시편의 기도문에서는 예수님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11-12절).
[시편 86:11-12, 새번역]
11.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12.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스올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내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시편 86편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시편의 기도자처럼 간구와 묵상이 결합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의 예수님처럼 고통과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을 묵상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정의하고 부조리한 문제들, 악과 고통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간구하고 묵상하는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영성의 사람으로 빚아져가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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