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예일 대학 신학부에서 학샐들을 가르치던 1970년대 말엽, 내 삶을 순식간에 뒤집어놓을 인물이 찾아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심지어 하찮은 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 제가 어디로 가길 원하시는지 알려주시고 거기에 흔쾌히 따르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기도의 응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도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심방 이야기로 시작해보려 한다. 어느 날 오후, 뉴 헤이븐New Haven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다. 문간에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얀 리세Jan Risse라고 합니다. 장 바니에Jean Vanier 씨가 안부를 전하라고 하셔서요." 장 바니에는 물론이고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의 공동체 라르쉬(L'Arche, 방주)에 관해서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나거나, 말을 섞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그이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로서는 난데없는 문안에 어리둥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고맙습니다. 음...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려야죠?"
"예? ...아, 아무것도 없어요. 전 그저 인사를 전해드리로 왔어요." 아가씨가 대답했다.
"그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고작 그 얘기를 하러 애써 찾오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여인의 대꾸는 한결같앗다. "정말이에요.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장 바니에 선생님의 인사를 대신 전하러 왔을 뿐이에요."
들을수록 당혹스러웠다. 아가씨의 인사를 강연요청이나 수련회 인도나 원고 청탁, 설교초빙, 집필의뢰 따위의 본론을 꺼내기 위한 서론쯤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안이 최종 목적일 리가 없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재우쳐 물었다. "인사말씀은 감사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럼 댁에게 뭐 해드릴 일은 없는 건가요?"
그러자 여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손님 대접이 말이 아니었다는 뒤늦은 자각에 허둥대며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얼른 들어오세요. ...그런데 어쩌죠? 학교에 약속이 많아서 금방 나가봐야 하거든요."
"아,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아가씨가 대답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게요."
저녁에 돌아와 보니, 식탁에 멋진 테이블보가 깔리고 근사한 접시와 은제식기, 꽃과 은은히 타오르는 촛불은 물론이고 와인까지 한 병 준비되어 있었다.
"이게 어찌된 거죠?"
"괜찮은 밥 한 끼 차려드리고 싶었어요."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런 것들은 다 어디서 구했어요?" 내가 물었다.
아가씨는 재미있는 표정으로 마주보며 대답했다. "선생님 댁 부엌과 찬장에서요. ...손을 탄 지 무척 오래돼 보이더군요."
무언가 독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낯선 이가 집에 들어와서 궁금한 걸 묻기는커녕 도리어 우리 집의 구석구석을 내게 보여주고 있는 꼴이었다.
얀은 며칠 더 머물면서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해주었다. 이윽고 떠날 때가 되자 다시 말했다. "잊지 마세요. 장 바니에 씨가 선생님께 안부를 전하셨어요."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얀이 왔던 일은 새까맣게 잊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장 바니에가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시카고에서 짤막한 침묵피정을 인도하고 있어요. 같이 하겠어요?"
순간 '강의를 해달라는 뜻인가?'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장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헨리, 말 그대로 '침묵' 피정이에요. 근야 함께 있으면서 기도하자는 거죠."
그렇게 해서 장과 만났다. 잠잠했다. 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없다시피 했다. 그 뒤로 몇 년 사이에 프랑스에 있는 공동체를 두 차례 방문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30일 동안 피정하며 묵상하는 기회를 가졌다. 얀 리세가 찾아왔던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분을 더욱 온전하게 따르게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일련의 사건 가운데 첫 단추였다는 깨달음이 갈수록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얀 리세의 내방과 라르쉬 공동체 식구가 되겠다는 결단 사이의 몇 년은 심리적인 풍파와 고뇌에 찬 탐색으로 범벅이 된 기간이었다. 예일 대학에서 10년을 보내고 나니, 한층 원색적인 사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깊은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한 다음부터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여생을 보내라고 부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생겼다. 결국 1981년에 예일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볼리비아로 가서 스페인어를 배웠으며 페루로 건너가서 빈민들과 더불어 사는 사역자의 삶을 경험했다. 거기서 보낸 몇 달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꾸준히 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의 기록들은 훗날 <소명을 찾아서Gracias>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묶여 나왔다.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게 가야 할 길인지 분간하기 위해 진지하게 탐색했다.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포부일 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서서히, 그리고 뼈아프게 깨달았다. 스페인어권에서 선교사로 사역할 만한 깜냥이 안 되고, 동료 선교사들이 줄 수 있는 이상의 정서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고단한 씨름 끝에 낙담하고 풀이 죽기 일쑤인 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채로운 일거리와 책임 탓에 내면의 평정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남미에서보다 북미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강의하고 저술하는 능력은 빈민보다 학생들 속에서 더 빛을 낼 수 있을 거란 얘기를 친구들의 입을 통해 들을 때마다 몹시 괴로웠다.
어쨌든 이상주의 선한 의도,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욕구만으로 소명을 정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또렷해졌다. 누구든 부름을 받고 파송을 받아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은 날 부르지 않았고 크리스천 공동체도 날 보내지 않았다. 볼리비아와 페루에서 대단히 유익한 경험을 했지만 기대했던 종류의 열매는 아니었다.
그 무렵, 하버드 대학에서 청빙제의가 들어왔다. 신학부에서 해방신학의 영적인 측면에 역점을 두고 크리스천 영성에 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주님이 남미에서 북미를 향한 '역방향선교'를 하라고 부르고 계시며, 그런 식으로 라틴아메리카 교회들을 섬길 수 있겠다는 확신을 품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학생들의 진정한 필요가 라틴아메리카 교회들의 화급한 이슈들을 알려주는 정보보다는 영적성장에 관한 문제에 더 치우쳐 있다는 게 드러났다. 따라서 강의도 일반적인 영성생활 쪽으로 급히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몸집만 더 커졌을 뿐, 예일 대학에서 했던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갈수록 하버드는 보다 철저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좇도록 부름 받은 자리가 아니라는 심증이 짙어졌다. 거기선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었다. 부루퉁해 있기가 다반사고 매사에 불마스러웠다. 학부나 학생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길을 찾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표들이었다. 의심과 불안이 극도에 이르자 얀 리세와 장 바니에, 라르쉬의 목소리들에 힘이 실렸다. 프랑스 라르쉬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은 평온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예일 대학이나 라틴 아메리카, 하버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 더불어 지내는 비경쟁적인 생활, 명성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반가이 맞이하는 식구들의 은사,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끈질긴 초대 같은 것들이 아직 몰모상태로 남아 있던 공간을 활짝 열어젖혔다. 더불어 거하라고 따듯하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라르쉬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은 주어야 할 무언가보다 받아야 할 것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장 바니에는 말했다.
"어쩌면 이곳에 집을 마련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내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갈망하던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그 소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을지라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주님을 더욱 원색적으로 섬기게 해달라는 기도가 응답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뼈대는 하버드 대학을 떠나 캐나다 데이브레이크의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 년에 걸쳐 꼬박꼬박 적었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해에는 대부분 장 바니에가 처음으로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집을 세웠던 트롤리 브뢰이유Trosly-Breuil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네덜란드와 독일, 캐나다, 미국을 비롯해 여러 곳들을 돌아다녔다. 프랑스로 갈 무렵에는 라르쉬가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대학에서의 삶과 공동체 생활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과연 그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일기장들은 그 씨름, 다시 말해서 "어떻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얽힌 영적인 싸움을 보여준다. <제네시 일기>와 <소명을 찾아서>에서 토로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이 여기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맥락뿐만 아니라 방향에도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를 원했다면, 지금은 가야 할 곳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도통 들지 않았다.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울려 살며 동역하는 건 그동안 훈련해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일들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였다. 라르쉬로 들어가는 것보다 불합리하고 쓸데없는 짓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얀 리세와 장 바니에, 라르쉬의 친구들과 지적장애를 가진 그곳 식구들은 따듯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가 댁의 집입니다. 당신에게는 우리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유능하고 성곡적이며 생산적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내면에서 반발했다. 라르쉬를 벗어나 주유하던 여행 가운데 일부는 거부의 몸짓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에 자각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런 방황은 옛길들을 뒤로한 채 "바라지 않는 곳으로"(요 21:18) 이끌리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씨름이었다.
본문에는 라르쉬와 기도,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울려 사는 삶, 예술, 도시생활, 영화제작, 에이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파리와 런던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캐나다와 거기서 펼쳐질 미래를 비롯해 크고 작은 인물과 사건들에 관한 사연들이 들어 있다. 그처럼 종잡을 수 없이 다채로운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끈은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예!"라고 답하려는 영적 싸움이다. 악을 쓰고 발버둥 쳐가며 내뱉는 "예!"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형편없이 깨지고 다쳐서 근본적인 치유가 절실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 "예!"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 체재를 마치고 찾아간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첫해를 지내며 겪은 일들을 간추려보았다. 데이브레이크에서는 일기를 계속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집을 찾은 뒤에 벌어진 일들을 담백하고 솔직하게 기록해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일기의 제목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은 트롤리에서 시간을 보낸 덕에 토론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의 초대를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 이 일기에 적힌 경험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이끌어주었다는 사실 또한 배경에 깔고 있다.
오밤중에 쓴 일기가 많아서 내용 중에 혼돈과 두려움,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새날이 밝아올 때쯤에는 소망이 가슴을 채웠다. 부디 이 일기를 읽는 이들이 저마다 영적인 여정을 이어갈 힘을 얻으며 그 심령에서 똑같은 소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 헨리 나우웬,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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