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라면을 끓이며”

habiru 2019. 2. 19. 21:51

  된장이나 간장, 무짠지, 오이지, 고추장아찌는 맛의 심층구조를 갖는다. 시간이 그것들의 맛의 심층을 빚어낸다. 기다림 없이는 짠지다운 짠지를 맛볼 수 없다. 김장이나 오이지를 담그고 나서 우리는 설레는 환상을 참으며 그것들의 숙성을 기다려야 한다. 미리 뚜껑을 열고 들쑤시면 동티가 나서 다 망친다. 시간이 간을 재료의 안쪽으로 밀어넣고 재료의 성질을 변화시켜 맛의 심층을 이룬다. 그 맛은 거기에 절여진 시간의 맛이다. 

  된장찌개 국물은 된장과 여러 건더기들의 삼투와 종합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국물은 된장도 아니고 개별적인 건더기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다. 거기에 깊이가 드리워진다. 그 깊이는 인간을 위안하는 힘이 있다. 미역국의 위안은 섬세하고 된장찌개의 위안은 깊다. 이 깊이와 섬세함은 스밈과 우러남에서 온다. 건더기는 국물 속으로 우러나고 국물은 건더기 속으로 스민다. 완성된 된장찌개 속에서 건더기가 뭉그러져서는 좋은 찌개가 아니다. 건더기는 그 고유한 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나서도 건더기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 건더기는 국물의 스밈에 의해 새로운 맛의 건더기로 신생生하는 것인데, 이 조화 속에서의 독자성은 아름답다. 

  삶의 심층구조와 서사적 로망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이 부박한 삶의 영양소로서 라면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시간의 작용이나 기다림, 환상, 스밈, 우러남처럼 삶에 깊이를 가져오는 기능은 음식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다. 

- 김훈, <라면을 끓이며>,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