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66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

윤동주/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고난 주간, 윤동주의 를 묵상해 봄이 좋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이다. 이 숭고함을 누구나 기분 좋게 좇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imitatio Christi)이란,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십자가를 올려다 보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나지막히 말하는 것만이 솔직한 나의 기도가 된다. 희망의 종..

벗 하나 있었으면/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나무 그늘에 앉아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나무 그늘에 앉아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은은함에 대하여/도종환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양유전이 국전에 처음 작품을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스승인 김봉룡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스승 김봉룡은 양유전에게 낙선한 작품을 내놓으며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를 하고 그만이었다. “네 것보다 나은 것이 많더라.” 제작 기간 내내 스승의 지도를 받았고, 스승이 손수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올라가 당신이 내어 접수한 작품이었다. 그 뒤 두 번 더 떨어지고 나서 장일순을 찾아갔다. 장일순은 다른 말 없이 를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 찾아갔다.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떨어져야 배운다. 댓바람에 붙어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며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그 뒤로 양유전은 당락에 개의치 않고 작품을 낼 수 있었다. 국..

“다음세대”와 “교육”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라는 말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요새도 심심찮게 쓰이고는 하는데, 예전부터 나는 그 어감을 퍽 불편하게 느끼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주일학교를 등한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음 세대”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무언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무용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음 세대”에 관련해 기억하는 유일한 화두가 18세기 영미권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역사에 관한 은준관 교수의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상징적으로 교회의 트렌드에서 내가 얼마나 비껴 있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다음 세대,” 혹은 “신앙의 전수”라는 말이 내게 살갑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조심스레 그것이 어린이들을 ..

담쟁이/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잡설: 소설 <투명인간>을 읽고

성석제의 소설 의 이야기는 “김만수”라는 이름의 사내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전개된다. 주인공 만수(萬壽)라는 이름 속에는 “오래도록 살라”는 좋은 뜻이 담겨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이름의 속뜻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일전에 나는 만수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면 한두 명쯤은 나를 돌아볼 것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로 만수는 흔한 이름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만수는 특정될 것 없는 익명의 “그(녀)”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만수를 통해서 평범한, 혹은 평균 이하의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만수와 그의 주변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나는 착각에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