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66

교회예전과 기독교윤리학 방법론(2)

매킨타이어에 있어서 사회적 실제는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협동적 인간 활동의 정합적, 복합적 형식”이다. 그것은 협동적 인간 활동이 사회적으로 축적된 것이다. 이 사회적 실제에는 선(gods)이 내재해 있다. 우리는 이 사회적 실제에 입문 또는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실제에 내재해 있는 선을 성취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적 실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일회 완료적 의미라기보다는 진행적 의미를 갖는다. 즉 그 사회적 실제에 참여하여 그것에 맞춰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적 실제는 그 사회의 풍토에 뿌리박아 그것에서 하나의 실체로 형성될 뿐 아니라, 그렇게 형성된 사회적 실제는 역으로 그 사회의 풍토와 그 구성원의 성품을 형성시켜 나가는 역할을 한다. 교회예전에 대해 우리는 매킨타이어의 ..

교회예전과 기독교윤리학 방법론(1)

침례와 주의 만찬은 주님게서 제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 두 예전을 지난 이천 년 동안 계속 시행해왓다. 이것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는 그 예전에 적합한 윤리적 가치를 내면화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두 예전을 제정하실 때 명시적으로 표명한 윤리적 가치는 없다.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는 명시적으로 주어진 윤리적 가치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도 교회예전을 시행하면서 윤리적 가치를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 예수님께서 침례를 가르치면서 근대의 인권 개념과 연관되는 평등적 가치를 가르치지 않으셨지만, 침례를 행한 자들의 모임 안에서는 평등이 실현되고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침례나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현대 이후에 강조되고 있는 공동체성의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먼저 예언자의 역할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그들은 그저 미래를 예지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합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본래의 고유한 진리와 정체성 가운데로 되돌리고자 힘쓰며 말합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공동체가 마땅히 따라야 할 그분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일하며 외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엇이 되라고 부르셨는지 모르느냐? 너희는 여기 온갖 불평등ㄴ과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한 네 사회 속에 평안히 앉아 있구나. 너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정말 잊었느냐?” ..

깊이 사고하는 동시에 열정적인 (설교)

일부 설교자들은 극단적으로 깊이 사고한다. 그들의 책상에는 주석들과 기타 책들이 높이 쌓여 있다. 그들의 성경적 정통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 그들은 공부할 뿐 아니라, 공부의 열매를 설교단으로 가져온다. 모든 설교는 고통을 감내한 성경 석의와 적용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는 침체될 대로 침체하여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설교단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간청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설교에는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열기도, 아무런 심장도, 아무런 열정도 없다.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의 설교를 듣고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설교를 듣고 어린아이가 이렇게 외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엄마, 저 아저씨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흥분하시..

구현된 은유인 교회

결국 신약 성경과 현재 시간 사이의 은유적 관계를 분별하는 과제는, 은연중에 신약 본문의 의미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과제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바울은 제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성숙하지 못한 고린도의 작은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인상적인 은유를 만든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그들의 말다툼과 과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대신 은유적인 과감함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복수에 주목-역주) 모든 사람이 알고 ..

목회의 현실

목회에는 영예로운 면이 많지만, 회중은 결코 영예롭지 않다. 회중은 니느웨와 같은 곳이다. 성공에 대한 기대가 별로 크지 않은 상황에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곳이다. 적어도 도표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예배와 기도의 장소에서, 날마다 일하고 노는 장소에서, 미덕과 죄가 오가는 혼잡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음을 누군가는 신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회중을 미화하는 사람은 목사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화려하고 열정에 찬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기에 우리 설교를 듣는 우리 회중들은 그렇게 되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대단한 회중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곳이든 오래 ..

유진 피터슨의 영성신학

브렌다가 온 다음 날 채리티가 새벽 5시에 브렌다의 방으로 오더니 침대로 기어 올라가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말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 애기(godtalk)' 하지 말아요, 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브렌다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채리티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포착했구나 생각했다. 그것은 황무지에서 목사의 소명을 단련시켜 주는 불 가운데 있던 내가 깨닫기 시작한 것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하나님 얘기'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채리티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 삶 전체라는 것이었다. 시편에서는 그것을 '산 자의 땅'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채리티의 말이 의미하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말과 글과 가르침과 기도로..

목회자의 소명

나는 그 예술가들과 윌리 오싸와 함께 2년간 그 금요일 저녁 시간들을 보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설명서에 따라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그렇게 가까이 지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보기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소명이 주는 정체성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성공적' 예술가가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그들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분명 윌리는 자신의 그림을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쉐키나 이야기

폴이 말했다. "유진, 이 이야기를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오래된 랍비 이야기야. 쉐키나는 집단적 비전을 일컫는 히브리어인데, 그 집단적 비전을 통해 흩어져 잇던 신성의 파편들이 한데 모이지. 보통은 빛을 퍼뜨리는 현존으로 이해해. 말하자면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빛이지. 하나님은 보통 어떤 장소에 계시진 않지만 말이야. 그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이라기보다는, 격려하거나 확인해 주기 위해서 혹은 우리가 아직은 볼 눈이 없는 어떤 것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재량으로 선택해서 보여 주시는 것에 더 가까워.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중세 때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자주 사용이 되었다네." 폴은 선지자 이사야와 닮은 그 수염 사이로 계속 말했다. "단어의 뜻은 ..

그늘이 되어

주님, 비 내리는 날 뒷짐 지듯 삽을 멘 채 논배미를 천천히 걸어가는 늙은 농부를 보았습니다. 그의 허리는 굽어 있었습니다. 흙과 더불어 살아 흙을 닮은 듯 그의 표정은 담담했습니다. 거룩함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늘 그 자리에서 땀 흘리며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주님, 세상길을 걷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숨이 가빠옵니다. 이러면 안 되지, 안 되지 하면서도 습관처럼 발걸음을 빨리 하며 삽니다. 그 분주함이 우리에게서 안식을 빼앗아 갑니다. 내적인 빈곤으로 인해 우리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뭔가를 향해 돌집합니다. 풀꽃 한 송이 속에서도 하늘을 보셨던 주님을 닮고 싶습니다. 주님, 이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누군..